1992년 바르셀로나 금메달리스트, IT 사업가로 변신해 새로운 전진!

[투데이코리아=심재희 기자]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은 '숙적' 일본을 여유 있게 따돌리고 4회 연속 종합 준우승의 목표를 달성했다. 모든 종목 모든 선수들이 흘린 땀방울이 모여 쾌거를 이뤄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을 받은 종목이 바로 '사격'이다. 사격은 금메달 13개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를 획득하면서 목표치를 갑절이나 넘겼다. '한국사격 전성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번 레전드 인터뷰의 초대손님은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세기의 명사수'다. 바로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이은철이 그 주인공이다. 은퇴 이후 IT 사업가로 변신해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은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 '사격천재' 이은철

'세기의 명사수'. 사격 선수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이은철의 별명이 '세기의 명사수'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총을 잡았다.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사격천재'로 각광받았다. 만 17세에 불과하던 1984년 태극마크를 달았고, 그 해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세계 사격 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항상 성실한 자세로 무려 17년 동안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자랑스럽게 활약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가 넘는 나이까지 대한민국 사격의 대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멋진 별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자 손사래부터 치는 이은철이다. "부단히 노력하면 '명중'시킬 수 있다는 게 저의 신조입니다. 선수 시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기본기 훈련인데요. 기본기를 잘 다져놓으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는 자신감과 전략이 저절로 따라온다고 봅니다." 10대부터 '사격천재'로 유명세를 떨쳤던 그 역시도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총알 없애는 기계'라는 또 다른 별명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이은철은 천부적인 재능에 노력까지 덧칠하면서 최고의 사격선수로 세계 만방에 이름을 떨쳤다. 태극마크를 달고 무려 5번의 올림픽에 참가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아시안게임에서도 5개의 금메달을 따냈고,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4개의 금메달을 보탰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사격 그랜드슬램'을 이룩했으니 '금메달 제조기'라는 또 다른 별명을 붙여도 될 듯 하다. 이에 이은철은 "기억을 더듬어 보니 금메달을 꽤 많이 땄네요"라며 웃어 보인다. 실력과 노력, 그리고 겸손함까지 갖추고 있는 모습에서 세계 챔피언의 여유가 묻어나 왔다.

# 올림픽을 제패하다!

사람들은 이은철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영광이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은철은 1984년 LA올림픽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당당히 참가했지만 쓴 맛을 봤다. "꾸준히 노력했는데 올림픽 무대는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말 많은 훈련을 했는데요. 결과가 좋지 못해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노력만큼은 금메달'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2번의 실패에도 흔들리지 않고 3번째 도전에 나섰던 이은철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도 이은철은 우승후보로 평가 받았다. 기대와는 달리 또 출발이 좋지 않았다. 예선에서 8위를 기록하면서 결승에 턱걸이 했다. 결승 진출자 가운데 가장 점수가 좋지 않았으니 올림픽 제패의 꿈은 멀어지는 듯했다. 주위에서도 '올림픽 금메달은 힘들구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은철에게 진짜 승부는 결승부터였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한 발 한 발 과녁 정 중앙을 맞혀 나갔고, 마지막 발을 10.6점에 꽂아 넣으면서 기적의 역전드라마를 완성했다. 경기가 끝난 뒤 그의 왼팔에는 실핏줄이 터져 멍까지 들어 있었다. "영광의 상처죠." 그 때를 떠올리는 이은철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올림픽 결승전에 오르는 8명의 선수들은 그야말로 '명사수'들이다. 예선 8위가 승부를 뒤집어 우승을 차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기적 같은 일을 이은철이 해냈다. 역전드라마를 쓴 비결에 대해서 물었다. "예선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자신감은 살아 있었습니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집중한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총을 잡은 손만 떨리지 않는다고 다 명사수가 아니다. 몸과 함께 마음도 흔들리지 않아야 진정한 명사수가 될 수 있다. '세기의 명사수' 이은철이 바로 그랬고, 언제나 한결 같았던 그는 올림픽 챔피언으로 당당히 올라 섰다.

# 한국사격 전성시대

광저우아시안게임의 선전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은철의 후배들이 이룬 쾌거에 목소리가 커졌다.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쁜 표정으로 흥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후배들이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이룬 결과가) 정말 대단하고 기특하지 않습니까. 지도자들과 선수들이 함께 노력하고 잘 조화가 되었기에 이런 좋은 성적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세계 최고 수준인 중국의 안방에서 이 정도의 성적을 거뒀다면 10점 만점을 줘야 합니다." 사격인의 한 사람으로서 후배들의 선전이 정말 고맙다는 말을 몇 차례나 반복하는 이은철이었다.

대한민국은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역대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금메달 13개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를 획득했다. 4년 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맛 봤던 치욕(금메달 3개)를 완전히 털어냄과 동시에 6개의 금메달로 잡았던 목표를 갑절 이상 달성했다. 이번 대회에서 사격이 따낸 13개의 금메달은 한국의 아시안게임 단일 종목 사상 최다 금메달이다. 종전까지 복싱과 태권도가 12개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사격이 기록의 새 주인공이 됐다. 역사에 남을만한 업적을 그렸으니 '한국사격 전성시대'라는 말이 나오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은철은 이번 대회에서 거둔 호성적에 대해서 '상향 평준화'가 크게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에는 소총 부분은 강했지만, 권총 부분이 조금 약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소총과 권총에서 고루 좋은 성적이 나왔습니다"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어 "진종오 선수가 권총에서 앞서 나가면서 후배들을 잘 끌어줬다고 봅니다. 진종오 선수의 세계적인 수준을 다른 선수들이 따라가면서 권총 부분의 전체 수준이 높아졌다고 봅니다. 앞으로 소총과 권총에서 모두 좋은 성적이 이어지길 기대합니다"라면서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 '명중'은 계속된다!

이은철은 현재 IT 업체 CEO다. 오랜만에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격선수가 IT 사업가로 변신했는지 매우 궁금해 한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후로 목표의식을 많이 잃었습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에 새로운 도전을 펼치게 됐는데, 그게 바로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사격 지도자의 길을 가려고도 했지만 인연이 안 닿았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은철은 은퇴 이후 실리콘밸리로 떠나 앤지니어를 거쳐 IT 사업가가 됐다. 그리고 업계에서 알아주는 능력 있는 CEO로 성장했다.

이은철이 IT 사업가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숨은 노력 덕분이다. 사격 선수로 활동하던 당시에도 그는 없는 시간을 쪼개 컴퓨터 공학을 공부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시간이 더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이은철이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공부를 오래 하다 보니 컴퓨터가 변화하는 것을 모두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큰 행운이었죠." 결코 쉽지 않은 상황에서 긍정의 힘을 발휘해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은철은 앞으로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스포츠 장학재단 설립'을 언급했다. 현재 하는 일을 계속 열심히 해서 분야에서 최고가 된 다음, 스포츠 장학재단을 만들어 꿈나무들을 지원하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그를 보면서 계속해서 떠오른 단어가 바로 '명중'이다. 그가 사격선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격을 통해 얻은 성실함과 자신 있는 결단력이 사업가로서의 성공으로 이어지고 있기에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세기의 명사수' 이은철이 스스로가 만든 과녁을 향해 계속해서 명중의 순간들을 만들어나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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