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케이프의 유혹’연작‥육체의 환상 초연한 기쁨


▲사진=판화가 박선랑

[투데이코리아=권병준 문화칼럼니스트] 꽃봉오리가 맺혔다. 그리움에 와락 다가섰는데 그는 손을 내밀었다. 젖은 볼을 가벼이 도닥거리며 쓰다듬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리. 오랜 고독의 손에 꼭 쥔 가물가물한 기억의 조각들.
새벽 종소리 계절의 하루를 깨우고 오늘의 욕망과 평안의 갈등 속에 수줍게 꽃이 피어올랐다.

흑과 백. 그대가 컴컴한 낭하(廊下)로 걸어들어 갈 때 나는 자꾸만 선술집으로 걸음이 옮겨지는 미묘한 긴장의 그 기로. 고개를 숙인 채 첫 걸음을 내딛을 때 가볍게 잡아채는 손목, 환영(幻影)이여!


▲사진=작품/lost object, 60×100㎝


욕망이라는 이름의 말(言)

껴안는다. 어둑어둑한 공간, 육체는 빛난다. 하나가 된 깍지 낀 손가락 잠재된 교감. 작가는 “인간의 정신세계인 자의식 중에서 무한 욕망이라는 정신세계의 표현적 근거를 심리학적 입장에서 이해하려 했다. 욕망이라는 정신세계를 신체의 일부분을 통해 정밀하게 또는 생략, 상징, 과장, 패러디라는 형식을 통하여 동판화를 표현하였다. 작품을 앞에 놓고 젖은 이마의 땀을 닦아낼 때 얼핏 눈물겹다. 허무와 애처로움을 처음 본 나는”이라고 했다.

뒷모습. 악수하듯 다가와 슬픔과 기쁨과 환상을 전해준 손. 아스라이 미련의 그림자를 가슴 아프게 남겨준다. 검은색과 몸에 새긴 문양(文樣)의 긴밀함처럼, 욕망은 말보다 먼저 다가왔다. 한줄기 허무의 바람이 스쳐지나 갔다. 마치 먼지 같은 까만 입자들이 날려가고 난 뒤 오롯이 드러나는 독백처럼 그것이 얼마나 통곡하듯 아픔이란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네.


사진=작품/Dream, 40×70㎝

오늘 보는 그대모습 잊혀 지기 전에 새겨놓고 싶다. 하얀 종이위에 드러나는 몸의 메아리여. 빛을 찾는 떨리는 손. 그때 구름 속을 빠져나온 희뿌연 햇살이 손등위로 부서지는 간결한 긴장. 두려움이면서 동시에 희망인 찰나. 구릿빛 나신(裸身)의 욕망과 정적을 깬 빛이 건드린 마음의 회전. 심상으로 그린 판화 그 끝자락에 있는, 오오 침묵이여!


▲사진=
Silence, 38×48㎝



희희낙락의 육신, 정신의 자유

동판은 무겁다.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단순작업 속에 복잡하고 미묘한 이야기들을 엮어간다. 작품의 팽팽하게 긴장된 극적(劇的)인 효과, 블랙(BLACK)의 깊은 맛은 그렇게 우러난다. “중독되지 않으면 몇 번이나 들어야하고 제대로 놓아 찍어야 하는 고된 노동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묵화처럼 검은색 작업, 그 위에 우연(偶然)이 스며든다. 오늘도 난 일기 쓰듯 동판에 새긴다. 하얀 종이위에 찍어낼 때 드러나는 나의 마음. 그것은 차라리 전율”이라고 노트에 메모했다.


사진=Memory, 50×70㎝


그러면서 “판화작업은 내 삶의 은총이다. 그래서 이끌린다는, 몰입된다는 것의 무의식 세계를 작업에 담는 것 같다. 물론 작업을 해 펼쳐보면 더욱 그렇게 선명해 지는 경우가 많다. 떠난다는 것은, 자유를 꿈꾼다는 것은 무언가를 비웠다는 것과 닮은 것”이라 덧붙였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비록 느린 걸음걸음으로 걸어 나오는 듯, 부분 혹은 해체된 화면의 이미지에서 절망의 늪을 헤쳐 나온 주름진 손등과 헤진 신발이 감싸 안았던 맨살의 상처. 묵묵히 제 바퀴를 돌아가는 저 시간의 궤적위에 화려한 춤사위 그림자 어른거린다. 아직은 새벽…. 생(生)의 중심을 관통하는 몸은, 뜨겁다. 희희낙락(喜喜樂樂)의 육신, 정신의 자유. 그것이 진정 이스케이프(Escape) 그 깊은 마력의 유혹인가!

동판화가 박선랑(Park Sun Rang) 작가는 중앙대 예술대학원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을 6회 가졌다. 1990년대 후반 인체를 소재로 동판화 작업에 몰입해 온 그녀는 최근 흑백뿐만 아니라 컬러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인체는 가장 완전한 존재라 여겼다. 그러니 가장 아름다울 수밖에. 작업을 하면서 몸과 마음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그 언어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의 몰입은 작업의 또 다른 선물”이라고 전했다.

#작품제목

1번=Deep Temptation, 70×40㎝ aquatint, etching
2번=lost object, 60×100㎝
3번=Dream, 40×70㎝
4번=Silence, 38×48㎝
5번=Memory, 5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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