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이 된 스크린 앞 국민은 '검증'을 원한다



# 19세기 말, 서재필·이상재·윤치호·손병희·이승만 등은 청(淸)으로부터의 자주권 회복을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했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A는 초대 부회장과 위원장을 거쳐 2대 회장에 취임해 그 누구보다 민족주권을 위해 헌신했다.

지금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독립문 현판을 쓴 것도 A였으며, 민족혼(魂)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창간된 독립신문은 매번 그의 업적과 희생을 칭송했다.

당시 반청(反淸)·탈청(脫淸)은 국책(國策)으로 지정될 정도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1894~1895년 청일(淸日)전쟁에서 패해 한계를 드러낸 청나라의 속국을 자처하면서 수구적인 입장만을 고수하다가는 나날이 진일보하는 시대변화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 서구열강의 '먹이'가 될 것임은 분명했다.

이러한 국책 시행의 선봉에 서 있던 독립협회 회장에 취임하고 협회 존속기간의 약 3분의 2를 이끌었다는 것은 A에 대한 조정과 지식층의 믿음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보여준다.

A는 이후 중앙정치에 진출해 조정 학부대신(學部大臣),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까지 올라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이 됐다. 앞서 고종(高宗)이 직접 그의 정계복귀를 요구할 정도로 A는 조정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A는 세상에 둘도 없는 능신(能臣)이자, 충신(忠臣)이자, 명신(名臣)이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조국을 구할 시대의 준걸(俊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반전이 있다. A는 사실 조국도 민족도 '역적(逆賊) 중의 역적'으로 규정한, 심지어 그의 집안까지도 그가 부끄러운 나머지 '족보에서 삭제해버린' 인물이다. 한세기 이상 지난 2016년 지금까지도 A는 '역적' '기회주의자'의 대명사로 회자된다.

그는 바로 저 혼자 살기 위해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를 팔아넘기고 동족이 신음하는 사이 죽을 때까지 호의호식(好衣好食)한 이완용(李完用)이다.

대한제국의 이완용 중용(重用)은 인사검증 실패의 대표적 사례다. 동시에 나라를 경영할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인사검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케이스다.



2016년 9월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인사검증 논란으로 뜨겁다. 주요 요직 인사를 강행하려는 청와대와 인사대상자의 각종 비리를 들춰내 저지하려는 야권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혹자는 청와대가 옳다, 혹자는 야당이 옳다고 하지만 분명한 팩트(fact)는 조윤선·김재수 등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들이 과거 여러 요직을 거치는 과정에서 부당한 방식으로 재산을 쌓아올렸다는 의혹이 짙다는 점이다.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는 직무관련성이 있었던 식품 관련 대기업 계열사의 호화빌라를 시세보다 저렴하게 매입하고 농협중앙회로부터 대출을 받아 평균금리를 훨씬 밑도는 초저금리 혜택을 받았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미 집이 있음에도 93평에 이르는 호화아파트를 불과 1억9천만 원에 얻어 7년간 전세값 인상 없이 거주했다는 지적도 있다. 농심(農心)을 챙겨야 할 농축산부 장관 이미지와는 전혀 동떨어진 '황제전세' 논란이다.

김 후보자는 그러면서도 모친(母親) 건강과 관련해 10년간 '빈곤층' 의료혜택을 받는 이중행보를 보인 것으로 알려진다. 국회 농해수위는 결국 "국민 기대에 못미친다"는 부적격 의견을 담은 청문보고서를 채택했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는 일부 혐의를 시인했다. 2012년 재산신고 당시 증가분 8억7천만 원 중 4억5천만 원이 소명되지 않았다는 지적에 "신고에서 누락됐다"고 청문회에서 답했다.

조 후보자는 이 외 약 27억 원의 아파트 시세차익 취득, 소득에 비해 비정상적 규모인 연(年) 5억 원 지출, 국회 정무위 시절 변호사 남편의 정무위 소관기관 부당수임, '자격미달' 딸의 YG엔터테인먼트 특채 등 의혹도 받고 있다.



국민의 공복(公僕)으로서 민생(民生)을 이해하고 봉사해야 할 공직자로서의 부적합성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음에도 인사검증 책임을 진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다.

조국과 국민을 위해 헌신할 인재 대신 수뇌부에 충성할 인사들만을 대상으로 '공직 돌려먹기' 혜택을 주는 "회전문 인사"와 같은 비판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league)'에서 축제판이 벌어지는 사이 국민 신음은 늘어나고 나라는 기울고 있다.

조윤선 후보자가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2014년 2월 여성실업률은 전년 동기 대비 1%p 상승한 4%를 기록했다. 앞서 여가부는 일과 가정의 양립, 경력단절여성 대책 등을 내놨지만 여성실업률 급등으로 전무(全無)한 실효성이 드러났다.

김재수 후보자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에서 퇴임한 올 8월 쌀값은 사상 유례없는 폭락 사태를 겪었다.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라 2005년 쌀값 폭락으로 자살한 정모 농민과 같은 사례가 또다시 속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진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6월 기준으로 청년실업률은 10.3%를 기록해 10%대를 돌파했지만 고위공직자 사이에서는 "민중은 개돼지" 따위의 망언(妄言)이나 나오고 있다. 나랏일 하라고 앉혀놨더니 귀한 국록(國祿)을 먹으며 "천황폐하 만세"라는 황당한 구호를 외치는 사람도 있다.



직접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지 않았다 뿐이지 결과적으로 국운(國運) 쇠퇴에 그 누구보다 '헌신'했다는 정황이 짙기에 경술국치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도처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인사검증 실패 의혹은 덮어둔 채 임명을 강행하려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미흡한 진경준 전 검사장 인사검증에 대한 해명도 없다. 20대 국회는 첫 정기국회 첫날부터 정부와 야권 간 기싸움으로 스크린이 엉망이 되고 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이완용과 같은 공직자의 '화려한 경력'이 아니라 '검증된 실무력과 청렴성'이다. 높은 실무력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청렴성은 민생 이해와 국민에 대한 헌신의 근본이 된다.

청와대가 눈과 귀를 덮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만큼 국민과 정부 간 괴리감은 비례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분명히 명기(明記)하고 있다. 정부 지지율은 지금 레임덕(lame duck) 마지노선인 30% 이하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국가와 국민의 명령뿐만 아니라 내후년 아름다운 퇴장과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닫았던 눈과 귀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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