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무 회장


올 겨울은 근래에 드물게 유난히 춥고 길다고 느껴집니다.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중에서 가장 추웠던 기억은 1998년 11월 하순부터 12월 초에 겪었던 중국 지린(吉林)성 서북부 바이청(白城) 지구의 추위였습니다. 제가 그해 3월에 농림부 기획관리실장직에서 명예퇴직을 하고 중국 연변 과기대 교수로 ‘경제정책론’을 강의하면서 부설 ‘동북아농업개발원’ 원장을 맡았을 때의 일입니다.

농림부의 지원을 받아서 당시 ‘농업진흥공사’ 주관으로 중국 동북 3성(랴오닝, 지린, 헤이룽쟝) 농업투자환경 예비조사를 실시했는데 제가 동참했던 것입니다. 11월 20일 첫 대상 랴오닝(遼寧)성을 방문코자 셴양(瀋陽) 공항에 내렸는데 대합실이 없어 바깥에서 그곳 안내를 맡은 심양농대 문 영래 명예교수를 기다리느라 30분 넘게 떨었습니다. 뭣도 모르고 홑바지를 입고 갔는데 기온이 영하 20도, 공항 바깥에 바람이 불어서 체감온도는 영하 30도 쯤, 거의 동사(凍死)지경에 이를 정도로 떨었었지요.

문 교수의 조언에 따라 곧바로 내복을 다섯 벌 샀습니다. 두 벌은 아예 털내복으로 사서 세 겹씩 껴입었습니다. 털모자와 귀밑에서 발끝까지 긴 두껍고 엄청 무거운 방한 외투도 사서 입고 나니 추위는 조금 피할 수 있었지만 몰골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아 여기가 정말 추운 곳이구나! 했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거기는 오히려 약과였습니다. 두 번째 지린성 서북부 바이청 지구 방문 때 진짜 시베리아 설한풍 추위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이청 지구는 지린성 성도인 창춘(長春)에서 서북쪽 끝, 내몽고자치구와 접경지역에 위치한 바이청(白城)시 일대를 말합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압록강, 두만강과 함께 만주평야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쑹화쟝(松花江)이 북쪽으로 흘러가다가 내몽고에서 내려오는 넌쟝(嫩江)과 합류, 제2 쑹화쟝으로 하얼빈을 거쳐 헤이룽쟝(黑龍江)으로 들어갑니다. 넌쟝 합수지점에 따안(大安)시, 그 동남쪽에 쑹웬(松原)시가 있는데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부여(扶餘)현’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통합되어 시가 되었겠지요. 아! 이곳이 바로 옛날 북부여의 중심지였겠구나... 감개가 무량했었습니다.

바이청시에서 쩐라이(鎭賚)라는 소읍까지 1시간 좀 넘게 자동차로 달렸는데 거기가 시베리아 설한풍이 바로 불어 닥치는 일망무제의 만주 벌판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 얘기로는 200km 떨어진 곳에서 남자가 서서 오줌 누는 것이 바로 보일 정도라나요. 이곳은 옛날 큰 강이 흐르다가 말라버린 뒤에 염분이 축적되면서 알칼리 토양으로 변해서 작물재배가 불가능한 땅이 되어 있었습니다. 중국 정부가 이 드넓은 황무지를 개발·이용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던 곳이기도 하지요. 저도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어서 현지 전문가들과 많은 논의를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곳의 추위는 참으로 끔찍했습니다. 기온이 영하 30~40도, 체감온도 영하 50도 이하라고 했으니까요. 오줌은 나오는 순간 바로 얼음으로 떨어지고 방한 차림을 있는 대로 다 하고 얼굴을 거의 외기에 닿지 않게 감쌌는데도 뼈가 시린 정도를 지나 아플 정도였고 어쩌다 외기에 노출되면 즉시 칼로 베는 듯이 살을 에는 추위였습니다. 문득 아주 먼 옛적에 세찬 눈보라 속에서 이 일대를 호령했었을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제 강점기에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벌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독립운동을 하시던 안타깝고 장한 우리 선열 할아버지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먹는 것도 몹시 부실했을 것이고 방한복은커녕 옷가지도 제대로 못 챙기셨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절로 눈물이 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투데이코리아 회장>

필자 약력
△전)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전)세계식량농업기구(FAO)한국협회 회장
△전)농어업농어촌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
△전)한국농어촌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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