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노사 협력을 바탕으로 임금을 줄여 일자리를 늘리는 이른바 '광주형 일자리' 사업이 우여곡절 끝에 지난 1월말 타결됐다. 노사 양보로 위기를 극복한 독일 폭스바겐의 ‘아우토(AUTO) 5000’을 벤치마킹한 사업 모델이 제시된 지 4년7개월 만이다. 광주형 일자리가 진통 끝에 출범하게 된 것은 협의를 통해 유예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이 들어있기는 하나 신설법인 설립 후 사실상 5년간 임금 및 단체협상을 유예하는 조항을 노동계와 현대자동차가 수용함에 따라 가능했다. 이로써 1998년 르노삼성차 부산공장 이후 22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땅에 완성차 공장이 들어서는 길이 열렸다.

광주형 일자리 사업은 광주광역시와 현대차가 민관 합작법인을 만들어 연산 10만대 규모의 배기량 1천cc 미만 경형 SUV 생산공장을 세우는 프로젝트로, 일자리 1만2000개 정도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구상이다. 근로자 연봉을 국내 완성차 업계의 절반 수준으로 낮춰 생산성을 높이는 대가로 정부와 광주시가 주거·육아시설 등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모델이다. 특히 광주시와 현대차, 지역 노동계는 최근까지 최대 쟁점이었던 누적생산 35만대 달성 시까지 임단협을 유예한다는 조항에 합의, 법인 설립후 사실상 5년간은 초기 임금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 유예조항이 노동자들의 쟁의권과 단체교섭권 등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단서 조항이 부속합의서에 포함됨에 따라 특별한 사정이 생긴다면 유예기간의 단축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자기자본 2800억 원, 차입금 4200억 원 등 모두 7000억 원이 투입돼 광주 빛그린산단에 들어설 이 공장은 올해 말 착공, 2021년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광주형 일자리는 노사상생과 지역 일자리 창출 등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시범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합의는 자동차 산업 환경 악화로 해외로 빠져나가기만 하던 일자리를 국내로 돌려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더 나아가 해외로 빠져나간 다른 업종·기업들이 국내로 유턴하는 획기적인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또한 평균 연봉이 9000만원을 넘는 국내 완성차업계의 고질적인 고비용 구조를 해소하는데도 도움이 돼 산업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강성노조가 주도해 온 자동차 업계에 노사 상생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어렵사리 첫 단추는 끼웠으나 아직 넘어야할 산이 높다. 원칙과 명분은 좋지만 우리나라의 노동운동 현실과 관행을 볼 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우선 공장이 들어서기까지 현대차 노조와 민주노총의 반발을 넘어서야 한다. 이들은 “광주형 일자리는 노동권을 무시한 저질 일자리”라고 펌하하고 “자동차산업에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정경유착 노동적폐 1호’라며 강력 투쟁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장이 들어선 후에도 강성노조가 설립돼 임단협 유예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임금을 올려달라면서 파업이라도 하게 되면 마땅히 대응할 방안이 없는 것도 문제다.

자본금 유치와 독립경영 보장, 생산물량 확보 등도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공장 건립에 7000억 원 정도가 필요한데 광주시와 현대차가 내는 자금은 각각 590억원, 530억원뿐이다. 나머지 자기자본금 1680억원과 운영자금 4200억원은 외부에서 수혈해야하는데 주로 국책은행의 자금이 동원될 것으로 전망된다. 때문에 벌써부터 광주형 일자리가 세금형 일자리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광주 공장은 지자체인 광주시가 주인이다. 광주시가 21% 지분을 지닌 최대주주로 경영 책임을 맡고, 자본금 530억 원을 투자하는 현대자동차는 2대주주로 자동차를 위탁생산만 할 뿐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법인은 공기업과 성격이 비슷해 정치권 등 외부 입김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의사결정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장애물과 시행착오에 부딪힐 우려가 크다. 그래서 이런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해 경쟁이 치열한 자동차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국내외 자동차 산업 환경도 우호적이지 않다. 세계 자동차 시장의 공급능력이 이미 포화 상태인데다 자동차 자체도 내연기관에서 전기차 중심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이에따라 일각에서는 “지금은 공장 신설이 아닌 미래 자동차 연구개발에 투자할 때”라며 광주형 일자리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낡은 사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연봉을 줄여 가격경쟁력을 확보한다지만 세계 시장이 포화 상태인데다 국내 경차 수요도 2012년 이후 급감하고 있어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사업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관심은 무척 크다. 인건비 절감으로 제조업 생산시설의 국내 유지와 일자리 창출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험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제 이 사업은 노사민정 대타협의 성과라는 상징성을 넘어 수익을 내는 비즈니스 모델로 안착시키는 과정이 무척 중요하다. 우려되는 갖가지 문제점을 노사 양측이 양보와 타협으로 슬기롭게 극복해 점차 경쟁력을 잃고 있는 국내 제조업을 부흥시키고 재앙에 가까운 고용부진을 타개하는 새로운 모형으로 자리 잡는 선례가 되기를 기대한다. <투데이 코리아 주필>

필자약력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논설위원실장
전)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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