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지난해 대법원의 강제징용피해자 배상 판결 이후 촉발된 한국과 일본 간 외교 갈등이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위안부 문제로 부터 초계기 소동, 문희상 국회의장 발언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갈등이 불거졌다.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갈등이 급기야 경제와 안보 분야까지 파장이 확대되고 있다. 우발적 계기가 더해지면 자칫 군사 충돌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 할 정도다. 양국은 한·미·일 동맹으로 묶인 우방이자 민주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나라들인데 마치 적국처럼 서로를 향해 마주 달리는 양상이다.

양국간 갈등으로 지난해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가 무기한 연기되더니 이번에는 오는 5월 개최 예정인 ‘한·일 경제인 회의’가 9월 이후로 돌연 연기됐다. 재계에서는 연기를 넘어 취소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한일 경제인회의는 대표적인 양국간 경제협력 협의체다. 경제협력 증진을 위해 1969년 출범한 뒤 지난 50년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는 회의다. 50주년이 됐으며 격을 높이고 행사 규모도 키워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오히려 정반대 모습이다.


그동안 양국은 과거사 문제가 불거져도 ‘정경 분리’라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 민간 경제협력만은 지속돼 왔다. 그런데 이것이 산산조각 날 위기에 봉착했다. 일본의 지지통신은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 한국의 징용 피해자 원고 측이 일본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의 한국 내 압류자산을 매각하면 일본 정부가 관세 인상에 나서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지지통신은 관세 인상 외에도 일본이 일부 일본산 제품의 한국 수출을 금지하거나 비자 발급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수출 금지 품목으로는 반도체 세정에 쓰는 불화수소, 전자장비 등 방위 전략물자가 거론되고 있다. 고순도 불화수소는 일본 기업이 세계 수요의 90% 이상을 생산, 공급하고 있는 사실상 독점 품목이다. 일본이 불화수소의 수출을 금지할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제조업체는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다. 국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체가 사용하는 주요 장비와 상당수의 부품이 일본산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우려되는 바가 크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품목을 포함하여 100여개 안팎의 보복조치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보도된 대로 일본의 보복조치가 현실화할 경우 한국도 맞대응하게 될 것이다. 양국간 무역 규모는 852억달러(지난해 기준)로 경제교류가 단절되면 양측 모두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우리는 일본에서 부품, 소재 등을 수입하지 못해 중간재 수출에 타격을 입게 되고, 일본 또한 우리 기업이 주요 고객인 반도체 장비 수출 등 여러 분야에서 악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안보 분야도 심상치 않다. 일본 해상초계기는 지난해 12월 20일부터 금년 1월 23일까지 4차례나 우리 해군 함정을 향해 근접 위협비행을 했고 이 과정에서 한국 함정이 일본 초계기에 미사일을 조준했다는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일본은 오는 4, 5월 한국에서 열리는 다국 해상합동훈련에 군함을 파견하는 계획도 취소하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대응하기라도 하듯 최근 한국에서는 반일 감정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경기도의회는 도내 4700곳 초.중.고교가 보유하고 있는 비품가운데 284개 일본 기업 제품에 대해 ‘전범 기업 제품’이라는 스티커를 의무 부착하도록 하는 조례안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전국의 여러 학교에서는 수십년간 불러온 교가가 친일인사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이유 등으로 교가 교체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일제가 강점기 시절 우리 국민들에게 저지른 악행과 전쟁범죄는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강제징용피해자 배상 등 과거사 문제를 여러 문제와 연계시켜 보복성 조치로 대응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일본이 그런다고 해서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행위로 대응하는 것은 오히려 민족주의를 정치에 악용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양국 지도자들은 국민 정서와 표를 의식해 한일 갈등을 조장해서는 안된다.

일각에서는 외교적 협상 노력만으로 최근의 한일 관계를 풀기에는 이미 선을 넘어섰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하지만 마주보고 달리면서 한쪽이 양보하기를 바라는 이른바 치킨게임으로는 더 더욱 이를 해결할 수 없다. 감정적이고 자극적인 행위는 갈등의 악순환을 부를 뿐이다. 자칫하다간 서로 싸우다가 양쪽 모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상처를 입는 ‘양패구상’의 과오를 저지르기 십상이다. 지금이야 말로 양국이 과거를 직시하고 상호 이해와 신뢰에 기초한 관계 발전의 중요성에 의견일치를 본 20년 전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정신을 되돌아볼 때다. <투데이 코리아 주필>


필자 약력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논설위원실장
전)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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