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기울며 이런 저런 모임이 부쩍 잦아지는 계절이다.

중·고교 동창 모임에서는 주로 학창 시절의 공부와 무관했던 파격적 행동들이 주요 안주거리로 등장한다. 대학 모임에서는 잘 나가고 있는 친구에 대한 시샘어린 농담(弄談)도 빼놓을 수 없는 반찬감이다.

사회 생활을 통해 형성된 사적 모임에서는 단연 '노무현 코드'씹기가 주식(主食)이라 할 만하다. 백성보다 소아(小我)를 중시하는 듯한 독선적 발언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반영해 별다른 이론과 반론이 없는 게 특징이다. 반면 차기 대권 주자들에 대한 찬반양론은 뜨겁다. 취기가 오르면 자연스레 그 모임의 특성을 반영한 조직의 문제점과 그 때 그 사람, 그 사건에 대한 추억이 술기운을 돋운다.

기자는 재경부와 금감위, 노동부 등 경제부처를 거의 10년간 출입한 까닭에 전·현직 공무원들과 점심·저녁자리를 통해 정부 조직의 가능성과 잠재적 위험성 등을 가늠해 볼 기회를 갖곤 한다.

요즘 재경부 사람들과 만남에서 주요 화제거리는 단연 J모 과장(51)이 던진 화두다. 그는 최근'이제 김진표·전윤철 前경제부총리겸 재경부장관님, 이정재 前금감위원장님께서 론스타에 외환은행 매각 당시의 판단 배경에 대해서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우리가 들을 수 있도록 의미있는 말씀을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시작되는 장문의 이메일을 한 기자에게 보낸 것이 여러 매체에 보도돼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부총리급의 정책적 판단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외환은행매각건에 대해 그들이 함구하는 바람에 당시 변양호 금정국장(보고펀드 대표)이 모든 혐의를 덤터기 쓰는 듯한 작금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듬뿍 담고 있다.

J과장은 20년간 재무부·재경원·재경부에서 금융정책 입안을 돕고, 각 종 금융사고를 실무 총괄자로서 '책임있게' 처리하는 등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공무원이었다. 때론 다혈질이기도 한 그는 2001년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현 대통령)에게 수협 공적자금 지원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직접 이메일로 보내 당시 이종구 금융정책국장(현 한나라당 의원)과 윤용로 과장(현 증선위 부위원장)이 노 장관을 찾아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화를 갖고 있다.

J과장의 이번 화두에 대해 제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극소수의 재경부 고위직 관료를 빼고는 대부분 '의미있는 또는 용기있는 행동'이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를 계기로 연말 모임에서는 외환은행건과 관련해 진념 전 부총리가 사석에서 김진표 전부총리(열린우리당 의원)를 꾸짖은 일, 재경부OB모임 '재경회'의 리더이자 환란 책임자로 옥살이까지 한 강경식 전 부총리 등이 '재경회 입장'표명에 적극성을 보였으나 후배인 현직 부총리를 감안해 자제한 일 등 여러 뒷얘기가 오간다.

용기란 사전적 의미로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 또는 씩씩하고 굳센 기운'을 말한다. J과장과 외롭게 검찰 수사를 받는 변양호 대표, 그리고 김진표 전부총리 등이 훗날 연말 모임에서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물론 선결과제는 전직 부총리들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는 자기희생을 감수한 '작은 용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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