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한 국제정세 속 비상한 자세·노력 절실

▲ 강원대 외래교수 류석호
▲ 강원대 외래교수 류석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면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미국 대선(大選) 일정과 판도에 미칠 파장이 크게 주목되고 있다.

재선을 노리는 공화당의 트럼프와 경쟁자인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간 박빙대결에서 ‘코로나 변수(變數)’가 판세에 결정적 영향을 끼침으로써 대북정책과 대중(對中)정책, 한미동맹,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한미자유무역협정 등 우리의 국방·안보·경제를 비롯한 제반 현안이 크게 요동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 당초 7일로 예정됐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한 일정이 전격 취소되는 등 여파가 한반도에 불똥이 튀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번 주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미 일 인도 호주 4개국 전략다자안보협의체(Quad·쿼드) 외교장관회의에만 참석하기로 한 것. 이 같은 ‘한국 패싱’은 미국이 쿼드를 중심으로 대중국 압박 행보를 계획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최근 잇따라 공개적으로 쿼드에 부정적 입장을 밝힌 게 영향을 줬다는 지적이다.

우리 정부가 다양한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대응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그런가 하면 G2 중국은 미국의 패권(覇權)에 맞서 자국의 이익과 우호 세력 다지기를 위해 무서운 기세로 이웃 나라를 압박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을 ‘미국 대 중국’의 구도에서 한층 유리한 ‘자유진영국가 대 중국’의 구도로 전환시키면서 입지가 좁아진 중국은 자유진영국가들 중 ‘모호한’ 한국이 약한 고리라고 인식,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다.

지난 8월 중국 외교사령탑인 양제츠 외교담당 정치국 위원이 방한, 시진핑 국가주석의 방한을 우선 추진하겠다는 언질을 준 것도 그런 속내에서다.

중국이 구사하는 ‘당근과 채찍’ 전략에 하나같이 신중한 고민이 요구되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外交)와 국제관계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중차대하다. 나라의 명운과 국민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잠시 한눈을 팔거나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는 날이면 천길 낭떠러지다. 역사학자와 외교전문가들이 ‘구한말(舊韓末) 상황의 데자뷰(deja vu)’라고 우려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신념과 비전을 갖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국제정세를 매의 눈으로 꼼꼼히 파악해 적절한 대응전략을 모색하며,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 나라의 이익과 국민의 안전을 위해 전력투구해야 할 때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최근 우리 외교는 영 미덥지가 않고 마뜩잖다.

원칙에 충실하면서 분명하고 설득력 있는 외교정책, 인사, 이슈 분석과 대처 등 총체적인 면에서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최고의 맹방 미국과 이웃 일본에 소원해지는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중국과 북한에 대해서는 뭐가 그리 중한지 배알과 배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는 사상 최악이다. 지난해 6월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찬밥신세가 된 것은 물론. 연이어 넉 달 동안 나라를 들썩이게 만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동’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실력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를 소홀히 다루다가 한·일 갈등에 미국까지 끌어들이는 자충수를 둔 끝에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간신히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외교가 미국과는 멀어지고, 일본과는 반목하고, 중국에는 무시당하고, 북한으로부터 멸시받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외교의 전면 쇄신이 시급하다.

지정학적 위치와 동맹관계 등에서 안보와 통상, 통일문제 같은 현안(懸案) 해결을 위해 세계 어떤 국가보다 외교적 역량이 중요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일례로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는 일본의 두 배를 넘어 70%에 이를 만큼 대외관계가 나라의 번영에 결정적인 요소이다.

한국무역협회와 국제통화기금(IMF), 통계청에 따르면 경제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인 무역의존도는 2017년 기준 한국이 68.8%(수출 37.5%, 수입 31.3%)로 일본 28.1%(수출 14.3%, 수입 13.8%)의 2.4배로 나타났다.

필요하다면 혼신의 지혜와 열정을 쏟아 거친 외교 격랑을 헤치고 대한민국호(號)를 안전하게 끌고 가야 할 책무가 정치 지도자들과 외교 공직자들에게 부여돼 있다.

그럼에도 위기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전(專, 전문성)’ 보다 ‘홍(紅, 이념이나 충성도)’을 중시하는 태도까지 보이고 있으니 정부의 역주행(逆走行)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타들어 간다.

최근 두 가지 대표적 사례만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 고위 외교관이 뉴질랜드에서 현지 행정직원을 성추행했으나 우리 외교부가 해당 직원을 감싸, 재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지난 7월 28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와 이 문제를 거론한 사태는 우리 외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망신스러운 사건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취임 후 3년여간 외교관 성추행이 계속 터져 나올 때마다 엄중 대처를 약속했으나 외교부의 ‘제 식구 감싸기’로 국격이 심각한 훼손을 입고 있는 모양새다.

2017년 말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에서 사건이 발생한 후 3년 가까이 피해자의 거듭된 피해호소와 엄정한 사건처리 요구를 묵살한 채 미온적으로 대응하다 화를 키운 것.

‘마이 웨이’ 인사도 입질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부가 곧 있을 추계 재외공관장 인사에서 주요국 대사·총영사 자리를 문재인 대통령의 측근 등 여권 인사로 채울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의 경희대 동문들, 현 정부 외교라인 요직을 장악한 ‘연정(延政·연세대 정외과) 라인’ 인사들이 주요국 대사로 대거 내정됐다는 소식이다.

21대 총선에서 불출마하거나 낙선한 여당 정치인 일부도 유럽 지역 공관장 자리를 받는 것으로 전해졌다.

과거 정부들도 특임공관장을 활용하곤 했지만 현 정부처럼 자질 논란이 있는 인사들을 무리하게 발탁할 정도로 노골적이진 않았다는 지적이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과거 정부는 특임공관장을 발탁하더라도 최소한의 전문성을 고려했는데 이 정부는 공관장 인사를 전리품(戰利品) 나눠 먹듯 한다"며 "외교 인재풀도 협소하다 보니 충성심 강한 사람들만 발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한 외교부 특임 공관장(대사ㆍ총영사) 중 3분의 2가 대선 캠프, 더불어민주당, 김대중·노무현 정부 청와대 근무 등의 이력을 가진 여권 인사로 드러났다.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실이 최근 외교부 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지금까지 임명된 특임 공관장은 총 42명. 이 중 28명(67%), 현직만 따져도 33명 중 21명(64%)이 이른바 ‘캠코더 인사(문재인 대선 캠프, 코드인사, 더불어민주당)’였다.

특임공관장의 막무가내식 행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의 경우, 주중대사로 있던 재작년 6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3차 중국 방문때 건강 검진 등을 이유로 휴가를 내고 귀국해 과거 국회의원시절 지역구(청주 흥덕) 행사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실이 드러나 야당들의 질타를 받았다.

주미 대사의 잇따른 설화(舌禍) 또한 예삿일이 아니다.

이수혁 주미 대사는 지난 6월 "이제 우리는 미·중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국가"라고 발언한 데 이어, 지난달 "한미동맹의 미래상에 대해 숙고해봐야 한다"라고 발언, 미국을 자극했다. 미국이 대중 견제에 적극 동참해줄 것을 전방위적으로 요구중인 가운데 한국이 미국에 일종의 '거리두기'를 하겠다고 언명, 논란을 자초한 것이다.

외교 사령탑인 강경화 외교부장관도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방한을 앞두고 지난달 25일 미국이 인도·태평양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역점 추진하는 전략다자안보협의체 ‘쿼드(Quad)’와 관련, 공개적으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다”며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이를 두고 외교가에선 “한국정부가 미·중 사이에서 미국의 동맹보다는 ‘중립국’을 자처하기로 작심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면서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 한미 현안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상당수가 외교무대 경험이 전무한 특임공관장을 비롯해 외교담당자들의 일탈과 돌출 언행 등으로 인해 외교적 결례는 물론 국익훼손 등 불상사가 우려스럽다.

여기에 최근 빈센트 브룩스 전 한미연합사령관에게 “끔찍하다”란 거친 표현까지 쓰게 만든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의 “족보 없는 유엔사가 남북관계에 간섭하지 못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발언 등 현 정권 핵심부에서 우리 안보의 기둥인 유엔사를 허물기 위한 작업이 집요하게 진행되고 있는 점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유엔사는 한국-미국-일본(후방기지)을 이어주는 한국안보의 핵심 중 핵심인 국제적인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선택으로 외교적 고립을 자초한 구한말 실패를 반복할 것인가.

위정자들이나 외교관들이 우리 역사에 나타나는 외교적 성패(成敗)의 결정적 두 장면, 고려 서희(徐熙, 942~998)의 거란과의 담판과 조선 말엽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거울로 삼았으면 좋겠다.

고려 태조 993년 서희는 외교가이자 문신으로서,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정책에 불안을 느낀 거란(契丹)이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할 당시, 막강 위세에 항복하거나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 이북의 땅을 떼주고 화의하자는 조정의 지배적 여론을 논박하며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고토회복(故土回復)을 위한 고려의 북진정책이 역사적으로 타당함을 밝히고 중간에 위치한 여진족을 평정하자고 거란을 설득해 군사를 돌려보냈다. 그 결과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지역을 다시 영토로 편입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서희는 거란의 출병 목적이 영토 확장에 있지 않음을 간파하고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고려의 입장을 조리있게 설명하며 거란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대신 당당한 태도로 ‘담대한 외교’를 선보였다.

외교에 등을 돌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행한 대외정책의 오판(誤判)은 아프기 짝이 없다.

이 시기 조선의 당면한 역사적 과제는 척화(斥和)가 아니라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근대화를 실현시켜 나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흐름을 외면했다. 화이적 명분론(華夷的 名分論)에 입각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의 배타적 이데올로기에 얽매어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고수함으로써 내우외환의 위기를 심화시킨 것.

역사학자 문일평(文一平, 1888~1936)은 ‘조선인과 국제안(國際眼)’에서 조선이 국가적으로 실패한 원인으로 민기(民氣)의 위미(萎靡)와 지도자의 ‘국제적 문맹(文盲)’을 지적하며 그 대표적 인물로 대원군을 꼽았다.

그런 점에서 대만의 행보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국과 달리 대만은 코로나 사태 초기부터 발 빠르고 단호한 대응으로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이상으로 대중(對中) 경제의존도가 큰데도 불구하고 지난 1월 22일 이미 우한발 입국을 막았고, 이어 중국 본토와 중화권 국가를 방문한 외국인의 입국까지 강력히 제한했다.

대만 정부의 대응에서 정치적 계산이나 중국에 대한 눈치보기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대만 국민들은 기존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며 이를 발판으로 외교다변화 정책을 꾸준하게 밀어붙이는 한편 대만의 주권과 독립성을 강조한 정부 대응을 높이 평가해 차이잉원 총통의 지지율도 급등했다.

한국에 비해 현저히 작은 국토에 국력도 미약하지만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며, 무엇보다 국민의 신뢰를 받고있는 ’강소국(强小國)‘ 대만이 부러워지는 이유다.

우리 속담에 ’친구는 옛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고 했고, 채근담(菜根譚)에 ’친구를 새로 맺는 것은 옛친구의 정을 돈독히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結新知 不如敦舊好, 결신지 불여돈구호)‘라고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한미동맹‘이라는 상수(常數)의 안전판(安全瓣)을 소홀히 하면, 가장 강력한 옛친구를 잃을 뿐만 아니라 새 친구로부터도 홀대받을 개연성이 높다.

개인이든 국가든 든든한 뒷배를 지렛대로 활용할 때 활로가 보이고 상대가 두려워하는 법이지. 이를 쉬 버리고 신흥강자에게 빌붙거나 알아서 기는 저자세는 무시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섣불리 대처했다가 소탐대실(小貪大失)로 중국에 호구(虎口)를 잡힌 지난 2000년 ’중국산 마늘파동‘과 2017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배치를 둘러싸고 반발한 중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에 ’백기(白旗)선언‘이라 할 ’3불(三不·3 NO, ①사드추가배치, ②미MD(미사일방어체제)참여, ③한미일동맹’을 하지 않겠다.) 약속‘을 한 충격적 사태는 외교수치의 극치다.

그렇다고 ’균형자론‘ 같은 어설픈 줄타기나 어정쩡한 중립(中立)은 자칫 양쪽으로부터 외면받기 딱 좋은 처신이다.

이미 우리는 구한말 자신의 실력과 진정한 우방(友邦)이 없는 ’중립국가론‘이 얼마나 허망한 신기루였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하거나, 산토끼를 잡으려다 집토끼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총성없는 싸움터인 외교전에서 전문적인 실력을 바탕으로 확고한 원칙 아래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전략적 사고와 치밀한 계산, 발 빠른 대처가 미흡한 지금과 같은 한국외교로는 갈수록 엄중한 국제정세와 높아만가는 외교격랑을 헤쳐나가기에는 역부족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기 바란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 전문가들이 심기일전(心機一轉)의 자세로 외교역량 강화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줄 것을 거듭 주문하는 이유다.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