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속 밀실 깜깜이 짬짜미 쪽지예산 없는 제 역할 되찾아야

▲ 강원대 외래교수 류석호
▲ 강원대 외래교수 류석호
바야흐로 국회 예산심사 시즌이다. 국회가 지난 2일부터 한 달 일정으로 본격적인 내년도 예산안 심사에 착수했다. 국회에 제출된 내년도 예산안은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올해 총예산 513조 5000억 원에서 8.5% 늘어난 555조8000억 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슈퍼예산’이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지난 2일 예산안 공청회를 시작으로 4~5일 종합정책질의, 9~10일 경제부처 심사, 11~12일 비경제부처 심사에 이어 16일부터 예산안조정소위가 본격 가동돼 사업별 감액ㆍ증액 심사에 들어갔다.

지난 주까지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부별 심사에서 추미애 법무부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충돌을 놓고 갈등을 벌였던 여야는 이날부터 가동되는 예산안조정소위에서 증·감액 폭을 놓고 기싸움과 줄다리기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여야는 내년도 예산안의 법정(法定) 처리시한인 12월 2일 자정까지 내년도 예산안을 처리하기로 했지만, 여야의 갈등이 격화된다면 올해도 법정 시한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예산안이 법정시한 내 처리된다면 국회 선진화법이 처음으로 적용된 2014년 이후 처음이다. 국회는 2015년과 2016년 각각 법정시한을 45분, 3시간 58분 넘겨 처리했으며, 2017년 12월 6일, 2018년 12월 8일, 그리고 지난해는 12월 10일에 예산안을 처리했다.

특히 2013년 예산안은 해를 넘겨 통과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당시 여야는 새해인 2013년 1일 오전 6시 4분 가까스로 예산안(342조원)을 통과시켰다.

그간 국회가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12월 2일)을 넘기는 늑장 처리와 여당 단독 강행처리를 되풀이했지만, 해를 넘겨 예산안을 본회의에 상정·처리한 전례는 1960년 준예산 제도 도입 이후 한 차례도 없었다.

그동안 국회에서는 예산안 늑장처리는 물론 합의정신을 무시한 여당 단독처리가 난무했다. 실제 지난 18대 국회는 현안 이슈에 발목이 잡혀 여당이 4년 줄곧 예산안을 강행 처리한 기록을 남겼다.

특히 2010년 12월 8일 예산안 통과 때는 해머와 전기톱, 소화기까지 등장하는 난투극이 연출됐다.

내년도 예산안은 코로나19 위기상황의 경제난 극복과 민생 안정을 위해 과거 어느 때보다 꼼꼼한 심사가 요구된다.

올해 미증유의 4차례 추경(追更) 편성 등을 통해 국가채무가 800조원을 넘어서고 나라살림 적자가 한 해 사이 108조원까지 불어난 엄중한 상황이다. 또 내년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이 올해 44%에서 47%로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스러운 전망이다.

특히 내년 서울시장ㆍ부산시장 등 대형 재ㆍ보선과 2022년 대선을 염두에 둔 선심성 예산과 사용처가 불분명한 깜깜이 예산이나 포퓰리즘 예산은 철저히 솎아내야 마땅하다.

당면한 경제난 극복과 민생 안정을 위해 정부가 충분한 예산을 확보할 필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전시성 사업이나 중복 예산 등 불요불급(不要不急)한 곳에 국민들의 피땀어린 세금을 허투루 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부 입장에선 경기 회복을 위해 감내(堪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확장적 기조로 편성했다지만, 예산은 세입(歲入) 싱황을 고려해 편성해야 하는 만큼 나라 곳간 사정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데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특히 올해 예상한 세수(稅收) 279조7000억 원 중 이미 법인세와 부가가치세 등 10조 원 가량이 덜 걷힐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세입은 줄어드는데 세출(歲出)만 늘리면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이다.

예산심의에서 선심성 사업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다면 국가 재정 건전성은 급속히 악화될 뿐만 아니라, 그 부담은 나중에 우리의 미래세대에게 전가(轉嫁)될 수밖에 없다.

헌법이 정한 국회의 국가 예산안 심의·확정 권한과 의무에 의거, 철저한 예산안 심사로 행정부를 감시·견제하는 ‘재정통제(財政統制)’를 통해 국회의 원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해야 하는 이유다.

매년 반복되고 있는 졸속(拙速) 밀실(密室)심사나 깜깜이 짬짜미(담합) 쪽지예산 같은 ‘고질병(痼疾病)’이 되풀이 되어선 곤란하다. 해마다 여야 힘겨루기로 법정 처리 시한인 12월 2일을 넘긴 것이 다반사(茶飯事)였다. 그런 불명예의 사슬을 21대 국회 마수걸이 해인 올해엔 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까지 상임위 심사과정 등에서 보여준 국회의원들의 행태는 올해도 구태(舊態)를 되풀이, 공염불(空念佛)에 그칠 개연성이 높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이 “15조원을 삭감하겠다”고 밝힌 정부의 2021년 예산안(556조원)이 상임위심사 과정에서 11조원 넘게 불어났다. 여야가 ‘주고받기식’으로 매년 각 상임위원회에서 대거 증액하고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예산을 삭감해 결국엔 정부 예산안대로 통과되는 관행(慣行)이 올해도 반복될 조짐이다. 사상 최대 국채(國債) 발행을 이유로 대규모 예산 삭감을 외친 야당의 주장이 올해도 빈말로 끝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국민의힘은 이달 초 정부가 낸 556조 원 규모의 내년 예산안에 대해 ‘현미경 심사’를 통해 불필요한 예산을 대거 삭감하겠다고 밝혔다. 내년도 예산안의 적자 국채는 90조 원을 찍고 내년 말 국가채무는 945조 원으로 올해 805조 원인 본예산 대비 140조원 늘어난다는 것이다. 또 국민의힘은 100대 문제 사업을 꼽아 예산을 적어도 15조 원 이상 삭감하겠다고 발표한 상태다. 특히 21조 3,000억 원 규모로 편성된 한국판뉴딜 예산의 절반을 줄여 소상공인과 육아·돌봄 예산 등에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각 상임위의 심사를 거치자 예산 삭감은커녕 11조원 이상 증액됐다. 지난해도 야당은 “15조 원 삭감”을 외쳤지만 정작 예산 심사에 돌입하자 상임위에서 약 8조 2,800억 원이 늘어났다. 예결위에서 불요불급한 사업들은 삭감돼 결국 정부 예산안은 512조 3,000억 원으로 당초 정부안(513조 5,000억 원)보다 1조 2,000억 원 줄어들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가 부채(負債) 증가를 이유로 줄이겠다던 15조 원의 10분의 1도 삭감 못 한 것이다.

올해도 상임위에서 11조 원 이상 예산이 증액된 것을 볼 때 야당의 말대로 예산이 대거 삭감될 분위기는 아니다. 국회가 올해도 각 상임위에서 증액된 예산을 삭감할 때 속기록도 남지 않은 예산 ‘소소위(小小委)’를 통해 여야가 주고받기식(짬짜미)으로 예산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여야 할 것 없이 의원들이 지역구 민원성 사업을 ‘쪽지예산’으로 끼워 넣고 부풀려진 다른 사업들을 조정해 정부 예산안에 가깝게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거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행태는 예전 보다 그 수위(水位)가 훨씬 더하다. 번번이 졸속 처리를 일삼고도 막무가내다.

올해 처리된 4차례 추경(追更)을 보면 예산결산위원회 상정에서 본회의 통과까지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전체 국회 심의 기간은 3주일 정도였다. 국회 심사 기간이 3~7일에 불과해 시작부터 부실 추경 우려가 제기됐다. 더불어민주당이 18개 상임위원장을 독식(獨食)한 후 단 이틀 만에 예비심사를 모두 끝냈고, 대부분 2시간을 넘기지 않는 벼락치기였다. 국회 심의 과정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한 것은 지출 효율성이 떨어진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299개에 이르는 3차 추경 세부사업의 경우, 꼼꼼하게 효율성을 따져야 함에도 급하다는 이유로 밀실에서 추진됐다. 한국판 뉴딜과 공공일자리에 대한 현미경 심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176석의 거대 여당이 힘으로 밀어붙였다.

기재부는 재정집행상황을 확인하는 재정관리점검회의도 지난 7월 31일 이후 한번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추경예산의 경우, 위기 때마다 주먹구구식 재정살포에다, 타간 돈도 못 쓴 부처들도 앞다퉈 예산 타내기에 급급하고, 급하다며 졸속 밀실처리가 문제로 지적된 지 오래다.

그러기에 수백개에 이르는 세부사업은 꼼꼼하게 효율성을 따져야 함에도 군사작전하듯 속전속결로 밀어붙인 것이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 상황에 따른 경제 살리기로 인한 ‘재정절벽(財政絶壁)’이 더욱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오죽하면 국회 예산정책처가 한국판뉴딜과 고용안전망사업 등을 콕 찍어 국회 논의과정에서 보완을 주문했을까.

한편 전체 특수활동비(특활비) 예산의 경우, 국민들이 내용을 알 수 없는 ‘깜깜이 예산’의 규모는 더욱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특활비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국가정보원 예산이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본예산에 포함되지 않은 예비비까지 포함하면 1조 5000억원에 달하는 예산이 국정원과 관련돼 있다. 국정원 본 예산의 2배 규모다.

문재인정부가 대공수사권 이관 등 국정원 권한 축소작업에 속도를 내는 상황에서 유독 국정원의 특활비가 늘어나는 것은 이런 개혁 기조(基調)와도 배치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국회 예결특위와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국정원의 내년도 예산은 7460억원으로 2017년(4931억원)에 비해 50.2% 증가했다. 국정원은 전임 국정원장들이 박근혜정부 청와대에 특활비를 상납한 사건 이후 특활비 명칭을 ‘안보비’로 바꿨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별도 영수증 증빙이 필요없는 예산이다.

숨겨진 비공식 예산이 본예산 규모를 뛰어넘기도 한다. 국회 예결특위 결산자료를 확인한 결과, 2019년 기준 국정원 본예산은 5446억원이었지만, 기획재정부 예비비에 ‘국가안전보장 경비’라는 항목으로 6000억원이 총액으로 편성돼 실제 특활비는 1조1446억원이었다. 배(본예산)보다 배꼽(예비비)이 더 큰 셈. 6000억원대 예비비를 감안하면 내년에는 총 1조3000억원이 넘는 특활비 집행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국정원은 이와 별도로 각 부처에 ‘정보예산’을 편성하고 예산집행을 감사할 수 있는 권한도 갖고 있다. 참여연대는 2019년도 예산안을 분석하면서 경찰청과 국방부, 통일부, 해양경찰청 등 4개 기관예산 중 국정원법에 근거해 편성된 정보예산이 최소 1900억원 규모라고 밝혔다.

한 언론사가 이를 근거로 내년도 예산안을 살펴보니 5개 사업에 편성된 예산이 약 1700억원으로 파악됐다. 다만 국정원은 정보예산의 경우 편성권만 있을 뿐 실제 집행권한은 각 부처가 갖고 있어 자신들의 예산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예산안 졸속심사 관행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재연(再演)되면서 정치권에서 ‘예산국회’를 상설화하거나 예산 심의 시점을 자동으로 못박는 방식으로 예산국회와 정쟁(政爭) 구도를 분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확산되고 있다. 지지율에 민감한 연말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심의를 마쳐야 하는 현행 예산심사 방식을 개선하지 않고는 당과 의원들의 이해관계(利害關係)를 예산과 연결하는 프레임(frame·틀)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연말에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으로는 예산을 무조건 통과시켜야 하는 여당과 예산을 볼모로 정치적 요구를 관철시켜야 하는 야당이라는 구조를 깰 수가 없다”면서 “미국 등 선진국처럼 연중 예산국회를 운영해 연초에 대부분 예산을 확정하고 상설 예결위를 통해 예산을 상시적으로 검토 조정하는 방식으로 예산국회와 여야의 정쟁을 분리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정치평론가 최창렬 용인대 교수도 “최소한 예산심사 법정시한 한달 전부터는 무조건 예산소위를 가동시키는 강제 규정을 만들거나 소위(小委) 구성 방식도 국회법으로 촘촘하게 규정하는 식으로 정쟁화를 막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일찍이 이미 25년 전,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라고 토로했었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이 같은 고언(苦言)을 받아들여 환골탈태(換骨奪胎)하지 않고 종전처럼 코미디같은 행태를 답습한다면, ‘국민의 선량(選良)’이 아니라 시쳇말로 ‘국해의원(國害議員· ‘나라와 국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의원’의 줄임말로 네이버 국어사전에 정식으로 등재)’이라는 오명(汚名)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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