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관 뚜껑 덮을 때 봐야 안다

‘사람은 관 뚜껑 덮을 때 봐야 안다.’는 옛 말이 맞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살아있는 권력은 공정한 평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오쩌뚱(毛澤東)은 살아서는 거의 신이었다. 그러나 사후에는 눈사람 허물어지듯 권위가 무너졌다. 문화혁명의 과오 때문이다. 가까스로 공(功)이 과(過)보다 큰 것으로 정리된 것은 중국 인민의 뇌리에 10억 인민의 해방으로 기록된 사회주의 혁명이 긍정적으로 남아있는 덕택이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사후에도 공과가 정리되지 않은 인물이 많다. 일제와 쿠데타 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탓이다.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이 대표적인 사례다.

10일 타계한 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한 쪽에서는 6.25, 특히 낙동강 방어의 영웅으로 칭송하는가 하면 한 쪽에서는 독립군을 전문적으로 잡는 일제 간도 특설대 출신의 친일파로 분류한다. 한국 현대사의 인물들의 평가가 다 그렇듯이 백선엽 장군 평가도 한국 현대사의 관점이 정리될 대까지 기다려야 할 일이지만 당장 국립묘지 안장 문제가 걸려있어서 논쟁이 더욱 불 붙었다.

무엇을 기준으로 한 인간의 공과를 평가할 것인가?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 그 밖에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그의 공헌에 이의를 달지 못할 사람을 제외하면 무엇을 기준으로 공과를 따질 것인지가 또 문제로  남는다.

이런 고민은 춘추시대에도 있었다. 특히 인생을 관혼상제의 틀 안에서 규정하는 시대에 한 줄  졸기(卒記)는 망자에 대한 총평을 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한 사람의 생애를 포폄했는가?

서기 전 659년부터 진(秦) 목공(穆公)은 39년간 재위하면서 훗날(서기 전 247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목공은 진(晉) 혜공이 망명시절의 약속을 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흉년이 들자 ‘그 임금은 무도하지만 그 백성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며 식량을 원조해 덕망을 얻은 군주였다. 그런데 ‘춘추’는 서기 전 621년 모공이 죽었을 때 그의 졸기조차도 쓰지 않았다. 이는 진나라에서 노나라에 부고를 하지 않아서 원천적으로 기록이 없거나 공자가 ‘춘추’를 편수하면서 폄하의 뜻으로 삭제해버렸을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후자의 가능성을 뒷받침할 만한 기사가 ‘춘추’의 배경을 상술한 춘추좌전 문공 6년 조에 보인다. 내용인즉 목공이 말년에 신하들과 술을 마시면서 “살아서 이렇게 즐거움을 함께 나누었으니 죽어서도 슬픔을 함께 나누자” 고 하자 동석했던 엄식(奄息) 중항(仲行) 겸호(鍼虎)를 비롯하여 77인이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그 맹세에 의해 모두 목공의 능에 순장(殉葬)되었다. 진나라 사람들이 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며 부른 노래 황조(黃鳥)를 공자가 시경에 포함시켰다. 공자는 <토용(土俑)을 만든 사람은 죄가 많을 것>이라고 했다. 순장의 단초가 된 토용을 만든 사람도 미워하거늘 순장의 전례를 만든 목공을 미워한 것은 당연하다.

백선엽 장군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대한민국 법정기관인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가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그가 독립군을 잡는 일제 ‘간도 특설대’ 출신이란 점이 문제가 되었다. 반대 여론도 있다. “일제의 강압적 체제 아래서 불가피하게 일본군에 입대해 복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반민족자’ 규정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이들의 논리는 ‘오랑캐 땅에서 자란 나무가 무슨 죄가 있느냐’는 식이다.

과연 그는 불가피하게 일제 장교가 되었고 간도 특설대 장교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마땅히 해방 후 고백과 참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 특히 일본어판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 백선엽회고록(若き将軍の朝鮮戦争 白善燁回顧錄)’ ‘대게릴라전 ― 미국은 왜 졌는가?(‘対ゲリラ戦―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를 보면 일제의 이이제의(以夷制夷) 한국인으로 게릴라(독립군)를 제압한다는 전략으로 창설된 한국인 부대에 근무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는 등 어디에도 부끄러워하거나 참회하는 대목이 없다. 국방부 공식기록에 의하면 그는 20세에 봉천군관학교 출신 소위로 임관해 32세에 육군대장이 되었고 6.25전쟁 대는 낙동강전선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의 영웅담은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2010년 이명박 정권이 그를 원수(오성장군)로 추대하려하자 일부 참전 원로장군들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불거진 것이다. 춘추필법대로라면 그의 졸기는 썩 좋을 것 같지 않다. 나쁜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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