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는 망명자를 어떻게 기록했는가


정치인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의 경호가 세간의 화제다. 권총을 휴대한 경찰관의 24시간 밀착 경호는 물론이고 음식점 등 서비스 업소에서 나오는 물 컵도 경호 요원의 체크를 거쳐야 한다. 그가 북한의 고위외교관 출신 망명자라 국무총리급에 준하는 경호대상이기 때문이다.
 
태 의원의 특수한 신분상 특별 경호는 당연히 필요하다. 다만 그러한 경호가 누구보다도 대민접촉이 많아야 할 국회의원 신분과는 걸맞지 않아 그를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한 미래통합당의 판단에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한 국회의원 신분으로 남한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본인의 선택도 상식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정치인은 일구월신 대중의 시선을 의식한다. 잊혀지면 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이슈의 중심에 있기를 갈망한다. 정치인이 더러 과장, 속단의 우를 범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태의원이 4월 15일, 북한 태양절(김일성 생일)에 김정은 위원장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두고 '김정은 건강 이상설'을 제기하면서 "그는 혼자 일어서거나 제대로 걸을 수 없다"라고 예단한 것이나 같은 탈북자 출신인 지성호 의원이 "김정은 위원장이 99% 사망했을 것"이라고 호언한 것도 정치인들의 조급증이 범한 실수에 속한다.
 
분단 이후 심심찮게 북한 인사들의 탈북·망명이 있었고 이들은 한결같이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어온 영웅대접을 받았다. 대신에 이들은 북한 사회를 비판하면서 남한 사회에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는 결국 남과 북, 두 독재 세력의 적대적 공존과 냉전체제를 고착시켰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냉전 체제에서 흔히 있었던 ‘김정은 신변 이상설’을 제기했던 태 의원이 국회의원 신분으로 대북전단 살포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다는 점이다. 북한이 남북화해의 상징이자 판문점 선언의 성과물인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나타났듯이 북한에 대한 모욕적인 내용을 담은 대북 전단은 남북간 우발적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장난이다.
 
태 의원이기 때문에 북한이 흥분하는 전황을 알면서 짐짓 냉전시대의 악습을 재현하는 태의원의 언행은 반시대, 반문명, 반민족 행위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저런 사유로 조국을 등진 사람이 많다. 춘추시대라고 다르지 않다. 19년을 국외로 떠돌다 중원의 패자로 등장한 진(晉) 문공(文公), 망명국의 책사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옛 임금의 유골에 매질을 한 초(楚)나라 오자서(伍子胥), 군주를 시해하고 망명했다가 시신으로 압송된 송(宋)나라 만(萬)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춘추는 이 사건들의 가르마를 어떻게 탔는가? 우선 정치적 망명과 범죄 도피를 구별했다. 정치적 망명은 난을 피해 망명한 사례와 하극상에 실패하고 도주한 사례를 구별해 전자는 옹호하고 후자는 폄하했다. 그 밖에 국경탈출은 땅문서(지도)를 가지고 도주한 인물에 한해서 그 오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겨울에 흑굉이 남읍을 가지고 도망해 왔다. 冬 黑肱 以濫來奔>식으로 실명을 써서 고발했다.
 
땅이나 재산을 가지고 온 범죄 도피자들은 위정자들과 달리 백성들 사이에서 호감도가 높지 않았는데 ‘좌전’에 ‘춘추’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뒷얘기가 있다.
 
서기전 552년, 주(邾)나라 서기(庶其)라는 사람이 칠읍과 여구읍을 가지고 노나라로 도망해 왔다. 조정에서는 임금의 고모와 혼인을 주선하고 식읍을 내렸다. 마침 나라에 도적 떼가 창궐하자 국정 담당자 계무자가 치안책임자 장무중(臧武仲)을 힐책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 “서기가 주나라에서 읍을 훔쳐가지고 왔거늘 종실의 딸을 아내로 주고 식읍도 주었으니 도적에게 상을 준 것이다. 도적에게 상을 주면서 도적을 제거하기는 어렵다”고 역공했다.
 
‘춘추’에 이름을 올린 대부분의 망명자들은 끝이 좋지 않았다. 서기전 546년 제(齊)나라 경봉(慶封)이 노(魯) 나라로 도망쳐왔다. 제나라에서 임금을 시해하고 국정을 농단하다가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도망친 것이다. 그런데 너무 화려해 사람의 얼굴이 비칠 정도인 수레가 입질에 올랐다. 이에 대부 전장숙이 “수레가 윤택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제나라)사람들이 크게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그가 국외로 도망온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이런저런 연유로 경봉은 노나라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송(宋)나라로 도망갔다.
 
경봉은 그 8년 후 초(楚)나라 영왕(靈王)에 체포되었다. 영왕은 경봉에게 도끼를 짊어지고 회의차 모인 제후들의 군막을 돌며 “누구든지 제나라 경봉처럼 임금을 시해하고 대부들과 결맹하지 말라”고 외치게 했다. 그러나 경봉은 반대로 했다. 초왕이 경봉을 주살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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