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하라. 오늘의 내 글이 훗날 나를 부끄럽게 할 수 있음을

 

1452년(단종 즉위년) 7월4일 세종실록 편찬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사관 이호문의 사초를 살펴보던 지춘추관사(편수책임자) 정인지(鄭麟趾)가 황희(黃喜)정승의 졸기(卒記)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전체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황희는 판 강릉부사 황군서의 얼자(孽子)였다. 대사헌 시절, 중 설우로부터 금을 받아 사람들이 황금 대사헌이라고 했다. 왕자의 난으로 참수당한 박포의 아내와 간통했다. 매관매직을 하고 형옥을 팔아 뇌물을 받았다. 처남들의 범법행위가 드러나자 헛소문이라는 글을 올려 변명했다. 죄를 지은 아들(致身)의 과전(科田)을 몰수당하자 몰수된 토지를 자신의 과전으로 바꿔달라고 청탁했다.>등 사초가 황희에 대한 세인의 평과는 사뭇 달랐다.

“황희가 황군서의 얼자라는 것은 황희 스스로 정실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허나 다른 내용은 듣도 보도 못한 얘기입니다” “30년 가까이 수상을 했는데 탐오한 이름이 없었습니다. 어찌 관직을 팔아먹고 옥사에 뇌물을 받았겠습니까? 사람들이 황금 대사헌이라고 했다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박포의 아내 사건은 진실을 알 수 없어요. 사실이라면 소문이 파다할 텐데 어찌 우리만 금시초문일까요. 한 사람이 사심을 갖고 쓰면 천세만세 고칠 수 없으니 큰일입니다.” 성삼문, 김종서, 허 후가 사초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사초를 삭제한 선례를 만들면 나중에 그 폐단을 막기 어렵다”는 이견도 있었다. 그러나 “사초가 오래돼서 빛이 누런데 이 한 장만 깨끗한걸 보면 나중에 추서한 게 분명하다” “비행부분을 삭제해야 한다.” “근거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으면 직필이 아니다.”는 반론에 부딪쳐 갑론을박 끝에 박포의 아내 건, 황금 대사헌, 불분명한 을 삭제하기로 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유형문화재 조선왕조실록 880권은 기사 한건 한건이 이런 과정을 거쳐 수록되었다. 사관의 사초는 당대에는 누구도 보지 못하고 그 임금 사후에 실록청을 설치해 편찬하기 때문에 현실 권력이나 사감에 치우침 없이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구한말, 어떤 외국학자가 조선의 상소(上疏)제도를 연구하다가 지방의 기생이 올린 상소문을 읽고 “이렇게 좋은 제도를 가진 조선이 망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던가. 상소는 왕조시대의 언로다. 조선조가 500년 단일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현실을 직언한 언관과 미래의 증언을 남긴 사관, 덕택일 것이다.

공자는 천하 제후들에게 왕도정치를 설파하다가 여의치 않자 후세의 거울이 되는 역사를 정리했다. 그렇게 나온 <춘추>는 노(魯) 은공 원년(기원전 722)부터 애공 14년(기원전 481)까지 12대 왕조 242년에 걸친 1870건의 사건을 짧으면 단 한 자, 길면 45자, 초간결체 문장으로 왕조와 제후의 흥망성쇠, 원인과 결과에 따라 엄정하게 포폄을 가했다.

붓을 내려놓은 후 공자는 <나를 알아주는 것도 춘추 때문일 것이요 나를 죄주는 것도 춘추 때문일 것이다(知我者 其惟春秋乎 罪我者 其惟春秋乎)>라고 말했다. 왕조시대 언관과 사관을 겸하고 있는 오늘의 언론인들이 이 부분을 어떻게 읽을까?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오늘 내가 쓴 기사로 인해서 훗날 부끄러울 수도 있음을. 그런 의미에서 지난 해 8월, 조국 전 장관 지명 후 2개월 동안 쏟아진 100만 건이 넘는 기사들, 한 가족을 일방적으로 위선자, 주식투기꾼으로 내 몰았던 ‘단독’ 기사와 논평들을 묶어 ‘백서’라도 만들면 어떨까.

코로나 이후 문명의 전환이 운위되는 지구촌의 재해에 한국 언론, 특히 보수 언론의 태도는 자연재해마저 정파적 이해득실에 맞추는 태도를 보였다. 자본주의 시대의 언론에게 왕조시대 사관의 가치관을 요구할 수는 없다. 설사 일개 직업인이요 뉴스 상품일 뿐이라고 치자. 다원화 사회이므로 언론이 친정파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정파이익을 위해 왜곡, 조작, 누락, 고의 오보로 대중을 기만해서야 되겠는가.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서 출입처가 거래처일 수는 없다. 정보 소비자 운동 차원에서도 언론개혁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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