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오프닝 멘트 과제 내고 "재미있게 사연 좀 써서 올려" 지시

[투데이코리아=권혜란 기자] 누군가 나의 아이디어를 훔쳐가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자신의 아이디어가 버젓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방송에 나가도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모 방송아카데미 40기 이다솜(가명, 21)씨는 아카데미에 들어온 후 방송작가에 대한 환상이 깨져 버렸다. 현직 방송작가를 겸하고 있는 아카데미 강사들이 학생의 아이디어와 글을 훔쳐 본인 방송에 갖다 쓰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 방송작가의 꿈을 안고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한 그녀에게 제자들의 글을 훔치는 방송작가의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인기 라디오 프로를 맡고 있는 한 강사는 수업 중 학생들에게 라디오 오프닝 멘트 과제를 낸다. 그 강사는 과제를 다 거둬간 뒤 그 중 좋은 글이 있으면 자신의 라디오 방송에 그대로 갖다 쓰기로 아카데미 안에서 유명했다. 강사 본인 라디오 프로 게시판에 "너희들이 재미있게 사연 좀 써서 올려!"라는 지시를 받는 일은 아카데미 학생들에겐 흔한 일이었다.
이다솜 씨는 "학생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날 당일 과제로 냈던 내 과제가 오프닝 멘트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황당하고 불쾌했다."고 말했다. "그 중 수업의 일환으로 기획안을 써오면 교묘하게 좋은 포인트만 여러 개 골라 짜깁기 해 자신의 방송에 갖다 쓰는 여자 강사가 가장 얄밉다."고 덧붙였다.
방송 아카데미 바닥에서 이러한 현상들은 '당연시 되는 분위기'로 어떤 제재도 가해지지 않는다. 방송계 인맥을 쌓기 위해 방송아카데미를 들어왔다는 이다솜 씨는 "학생이 강사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쌓아놨던 '인맥'을 끊는 일이라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다"며 "학생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스승에게 도둑맞아도 이의나 불만을 표출할 수 없는 것에는 이런 아카데미 분위기도 한 몫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직 방송작가 밑에서 배우는 제자들은 절대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이디어에 대한 구체적인 법이 아직 없다. 아이디어 자체를 지적재산권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고 여기는 실정. 저작권법은 아이디어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창작물에 대해서 보호 가능하다.
이다솜 씨는 "과제를 할 때마다 저작권을 신청하기도 좀 그렇고.......이런 사태에도 큰 소리를 낼 수 없는 약자들이 자신 외에 수두룩할 것이다. 한마디로 '먼저 갖다 쓰는 게 임자'라는 말이 방송계의 정석같다"며 "방송아카데미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자신이 다니는 방송아카데미 뿐만 아니라 다른 아카데미에서도 '제자 아이디어 훔쳐쓰기'는 일상다반사"라고 전했다.
한 강사는 이다솜 씨가 아주 좋은 아이디어를 가져갔을 때 '이건 아무한테도 가르쳐주지 말고 네가 서브작가정도 됐을 때 써먹으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고 한다. '먼저 갖다 쓰는 게 임자'라는 방송계 분위기를 누구보다 강사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
이다솜 씨는 "여기에 글을 쓰려고 온 것인지 막내작가 취급을 받으면서 서브작가, 메인작가에게 매일 자신의 글과 아이디어를 빼앗기는 것을 눈뜨고 보러 온 것인지 모르겠다"고 아카데미의 어이없는 실태에 대해 회의감을 드러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방송 작가는 "미디어 사회로 들어선지 오래이지만 우리 사회는 아이디어에 대한 법적 규제, 절차가 부실하다 ”며 “아이디어도 하나의 지적재산으로 보고 그 지적재산을 지킬 수 있는 법이 시급하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