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경 작가
▲ 조은경 작가

 

영천에 내려와 살게 되다보니 서울의 친구들과는 옛날만큼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된다. 열심히 만나던 모임들이 점차 소원해졌다. 그래서 더 불행해졌는가? 생각해 보았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어느 날 강남의 새로 된 멋진 아파트를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동 호수를 찾으려고 고개를 쭉 빼고 이리저리 살필 때였다. 알듯 한 얼굴이 앞에 쑥 나타났다. 대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후배란 걸 금방 알아챘다.

“어머, 언니 여기 입주했어요? 다행이다. 한 달도 안 되어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니, 나 누구 찾아왔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후배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너무나 빨리 사라져서 과연 내가 그 사람을 만나기라도 했었나? 의문이 들 만큼.

그날 밤, 남편한테 그 이야기를 하면서 투덜투덜, 우리도 그런 데서 살았으면 그 애한테 완전 ‘따’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이 세상에 돈이 만들어 내는 부(富)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철저히 배타적인 환경으로 이루어진다는 그런 소박한(?) 깨우침 같은 것을 느꼈던 때이기도 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으니 시리도록 푸른 청춘이었을 시기다.

이 후, 수 십 년 동안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왔다. 누구나와도 같이.

그러면서 관계 속의 수많은 결을 느껴왔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은 후배의 역할을 내가 알게 모르게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기도 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더욱, 가벼운 관계보다 깊고 따뜻한 관계가 그리웠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마음을 주었던 상대방에게서 오해를 받거나 무시를 당하거나 내 생각과는 다른 비중을 할애 받을 때의 서운함이 커져 가기도 했다.

이 곳, 영천의 자연에 안기면서 나는 평화를 얻어가는 것 같다. 생활의 변화는 많은 면에서 평소에 보지 못하던 점을 보게 해 준다.

서울에 여고 동창의 모임을 비롯해서 몇 개의 모임이 있다. 떨어져 있다 보니 가끔씩 서로 통화로 아쉬움을 달래곤 하는데 부담 없는 카톡으로 한 시간 이상씩, 속 이야기를 터놓으면서 통화를 하는 친구들이 있어 내게 한량없는 기쁨을 준다. 한 때 살았던 전라도의 어린 후배는 친정이 대구인데 친정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 집에 찾아와 준다.

떨어져 있다는 것이 이렇게 관계의 명암을 뚜렷이 해 주기도 한다. 작은 숫자라도 마음 맞는 친구들과의 만남이 귀하다는 것을 느낀 것도 이렇게 멀리 있어본 후였다. 물론, 이곳 시골에서도 서로 이야기가 통하는 친구들을 만들려고 노력할 생각이다. 나이를 떠나, 성별(?)을 떠나, 관심 분야를 토론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들고 싶다. 매일 저녁 오늘 만난 사람들을 적어 놓고 그들의 특색을 적어 놓는다. 그들은 택배원이기도 하고 전자 제품 서비스원이기도 하고 우리 정원에 심을 나무를 의논하러 온 조경회사의 직원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에 영원히 살 것이므로, 이곳에 우리의 정원을 만들 계획이므로, 가까운 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소중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제목의 단편소설이 있다. 톨스토이 작품인데 죄를 짓고 천국에서 쫓겨난 미카엘 천사가 그 주인공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세 가지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숙제를 받아가지고 지상에 내려온 것인데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그 정답을 드디어 맞추고 천사는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많은 사람들이 소원하지만 원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만큼씩 돌아가지 않는 것이 또한 사랑인 모양이다. 그럴 때, 사랑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 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자연이다. 자연의 무궁무진함과 광대함에 사람들이 압도당할 때 인간의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치유된다. 그만큼 자연의 품은 넓다.

먼 곳에 있는 친구들이 내게 소식 줄 때를 기다릴 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의 귀함에 눈을 돌리자.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가족에게, 이웃에게 듬뿍 사랑을 주도록 하자. 그러면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어우러져 내 마음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친구가 멀어진 것 같다면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연락을 취하도록 하자. 전화로 자주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읽은 책에 대해서도, 가고 싶은 여행에 대해서도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품에 안겨서 평화를 느낄 때, 좀 더 긴밀해진 주위와의 사랑으로 평화를 느낄 때, 우리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
조은경 약력
△2015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소설 '메리고라운드' '환산정' '유적의 거리' '아버지의 땅'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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