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정부가 일본식 정년 연장 방안을 중장기 과제로 검토하기로 했다. 홍남기 경제 부총리는 기업이 ▲정년 연장 ▲정년 폐지 ▲퇴직자 재고용 등 3가지 방안중 하나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하는 일본의 ‘계속고용제도’를 2022년부터 본격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2월 대법원이 육체노동자로 일할 수 있는 최고 연령을 기존의 만 60세에서 65세로 올려 판결하면서 불이 붙기 시작한 정년 연장 논쟁을 시간적 여유를 갖고 공론화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겠다는 의도다.
홍 부총리는 지난 6월 “인구구조 개선 대응 태스크 포스(TF)에서 이 문제를 집중 논의하고 있다”면서 "빠르면 이달말께 정부안을 공개하겠다"고 밝혔으나 젊은 층과 기업의 반발 등 사회적 파장을 고려, 좀 더 시간을 갖기로 한발 후퇴했다. 이는 정년연장 논의가 세대, 계층간 다양한 갈등 가능성을 안고 있고 임금체계 개편과 노동시장 개혁이라는 문제와 얽혀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부가 정년연장을 거론하는 이유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저출산.고령화로 노동시장의 판도가 급속히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줄기 시작한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내년부터 10년간 연평균 32만5000명씩 감소한다. 반면에 노인인구는 48만명씩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2025년에는 '노인인구 1000만명 시대'에 진입, 노인이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가 된다. 이같은 인구구조 변화는 경제 활력을 저하시키고 젊은 층의 노령인구 부담을 늘려 한국 경제를 더 깊은 수령에 빠뜨리고 국민들의 삶의 질을 낮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년을 늦추면 생산가능인구가 늘어나 경제성장률 하락을 완화하고, 노인 부양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복지 수혜자가 일하는 인구로 바뀌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연금 등 각종 복지 혜택을 받기까지의 소득 공백을 최소화해 노인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고 연금 고갈 시점도 늦출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예상되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우선 가뜩이나 부족한 청년들의 일자리가 더욱 줄어들고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정년 연장이 반드시 청년일자리 감소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고용시장에서 은퇴하는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반면에 생산가능 연령대로 진입하는 젊은이들은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댄다. 사실 앞으로 10년간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갈 베이비붐 세대는 연 80만 명에 달하나 노동시장에 들어오는 10대는 40만 명에 불과할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노인들이 퇴직하지 않고 일자리를 유지한다면 청년들이 취업할 일자리가 그만큼 줄어드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누구나 선호하는 공무원과 공공기관, 대기업 등 양질의 일자리 는 더욱 그럴 것이다. 게다가 정년 연장이 기존 정규직 근로자의 기득권 강화로 이어져 그 부담이 고스란히 비정규직 근로자와 중소기업으로 전가되면서 노동시장 양극화가 심화할 우려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공공기관은 물론 기업 상당수가 근무 연한에 따라 임금을 올려주는 ‘호봉제’ 임금체계를 채택하고 있다. 근로자 해고가 어려운 상태에서 직무 능력과 생산성에 따른 임금체계 변화 없이 정년 연장이 단행될 경우 철밥통만 양산, 국가나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고용비용이 증가하면 신규 고용을 기피, 가뜩이나 심각한 청년실업 문제가 더욱 악화돼 세대 간 갈등을 부를 가능성이 무척 높다.
정년연장은 시행시기가 무척 중요하다. 우리보다 앞서 청년실업 문제를 겪었던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에선 취업 빙하기인 1993~2004년까지의 사회 진출 세대를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고 부른다. 졸업 후 제대로 취업을 하지 못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 세대는 일본이 호황을 맞아 노인까지 일해야 할 정도로 구인난이 심한 지금까지도 계속 뒤처진 삶을 살고 있다. 구인난 속에서도 여전히 국가에 짐이 되고 있는 40~64세의 중장년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현재 61만여 명에 달하고 있다고 아사히신문은 보도했다. 이를 반영, 일본에서는 80대 부모가 히키코모리 50대를 부양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 '8050문제' 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정년연장 문제는 인구 구조 뿐만 아니라 국가재정, 노동시장, 고용형태, 연금, 노인복지 등과도 얼기설기 얽혀있다. 단순하게 정년연장이 저출산.고령화와 연금 고갈 문제를 손쉽게 해결해 주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편의를 위해 밀어붙였다간 계속 고용제가 경제 활력이라는 취지는 살리지 못하고 사회적 갈등만 증폭시킬 수 있다. 선의로 도입한 정책이었지만 나쁜 결과를 초래한 최저임금의 재판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정년 연장이 성공하려면 젊은이들의 취업난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기업들의 추가 인건비 부담이 과중하다고 느끼지 않을 정도가 돼야 한다. 경직된 노동시장을 그대로 둔 채 정년만 연장하면 노동생산성은 떨어지고 기업의 인건비 부담은 커져 청년취업난이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 <투데이 코리아 주필>
약력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논설위원실장
전)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