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물가상승률이 두 달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디플레이션 논란이 일고 있다. 물가상승률은 8월에 -0.04%, 9월에 -0.4%를 기록했다. 통계청은 “8월과 9월 연속 마이너스라고 하지만 물가상승률은 비교 가능성과 오차 등을 고려해 소수점 첫째 자리까지만 표시하기 때문에 8월은 0.0%이고 9월이 -0.4%”라며 공식적으로는 9월이 사상 최초의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로는 2개월 연속 마이너스다.


올해 들어 물가는 계속 0%대에 머물다가 급기야 8월에 마이너스로 떨어졌고 9월에는 마이너스 폭이 더 커졌다. 앞으로도 이런 '마이너스 물가'가 1~2개월 더 이어질 것으로 통계청은 내다봤다. 이에 따라 한국에도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일본식 장기 불황’이 엄습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물가 상승에 시달려 온 서민 입장에선 마이너스 물가가 무척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경제가 활기를 띠면서 물가가 안정세를 보인다면 바람직하지만, 경기둔화 국면에선 저물가가 경제를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 물가가 계속 하락하면 물건을 사는 것보다 돈으로 갖고 있는 게 이득이 된다. 돈 가치가 높아지니 소비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기업들의 재고가 늘어나고 생산과 투자가 감소하게 된다. 이처럼 기업들의 형편이 어려워 지다보면 실업이 늘어나고 근로자 임금도 오르지 않아 가계 살림이 빠듯해진다. 디플레이션은 경제 활력이 떨어지면서 민간 소비와 기업 투자 등 내수 부문 총수요가 크게 위축되는 현상으로, 단순 저물가가 아니라 ‘경기 침체와 맞물린’ 지속적인 물가 하락을 의미한다.

1990년대 말부터 일본에서 이런 디플레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의 소비자물가는 1999년 0.3% 하락한 뒤 2005년까지 줄곧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1997~2008년 일본 민간 소비는 0.6% 증가에 그쳤다. 이전 5년 동안 2.0% 증가했던 점을 고려하면 급락 수준이다. 일본 근로자의 1인당 명목임금도 1997년 360만 엔에서 2014년 313만 엔으로 12.9% 감소했다. 물론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도 1990년대 1.5%에서 2000년대 0.6%로 반토막 아래로 떨어졌다.


경기침체 속에 수요 부족으로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가 오면 고용 감소와 저성장이 전개되고 다시 수요가 위축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일단 디플레에 빠지면 헤쳐 나오기가 힘들어 그 나라 경제는 거덜 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디플레에는 통상 '공포'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우리경제가 이를 향해 치닫고 있으니 걱정이다


작금의 물가동향을 놓고 해석이 엇갈린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마이너스 물가가 일시적인 현상이며 디플레이션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일축한다. 역사적으로 디플레이션이라면 일본처럼 물가가 절반 이상의 품목에서(50~70%) 장기간 내리면서 특히 부동산 등 자산가격 하락이 동반해야 하는데 우리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마이너스 물가는 농축수산물과 국제유가의 하락 등 공급 측면에서의 일시적 요인과 정부의 복지 확대와 고교 무상교육, 부동산시장 억제와 같은 정책 요인에 기인한다며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 상황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부 연구기관과 전문가들은 지속적인 물가하락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본식 디플레이션이 점차 현실화되는 징후일 수 있다면서 외환위기와 같은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이 아닌데도 물가가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은 심상찮은 조짐이라고 경고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경기부진에 따른 마이너스 수요 압력이 저물가현상을 낳았다고 분석했고 현대경제연구원은 올해 들어 줄곧 소비자물가상승률이 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준(準)디플레이션 상황’이라고 규정했다.


디플레이션의 공포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국경제가 총체적 어려움에 봉착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경제의 근간인 제조업 생산능력이 12개월 연속 하락하면서 역대 최장기간 내리막길을 걷고 있고 물가 수준을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가 3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상태다. 수출은 작년 12월 이후 10개월 연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고 7월 소매판매액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등 소비심리 위축도 심각한 상황이다. 어느 것 하나 좋은 게 없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국내외 경제사정이 온통 잿빛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전쟁과 일본의 수출규제에 이어 최근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원유 시설 피폭으로 국제유가 변동성까지 커졌다. 경기 파주에서 시작된 아프리카돼지열병(ASF)도 육류 가격에 새로운 리스크를 던져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가 마이너스를 지속한다면 소비자들은 더욱 지갑을 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기업 매출이 타격을 받고 투자가 정지 된다. 벌써부터 기업들은 투자 계획을 보류한 채 현금 확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동안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인플레’만 무서운 줄 알았던 우리 앞에 ‘장기 저성장’이라는 경험해보지 못한 경제가 펼쳐지고 있다. <투데이 코리아 주필>


약력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논설위원실장
전)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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