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에 해외여행을 1주일간 다녀왔고 명절을 서울서 쇠다보니 2주일 가까이 시골집을 비웠다. 택시에서 내려 보니 아니, 집이 예전 집이 아니었다. 깜짝 놀랐다. 정원으로 들어가는 길 옆, 담 삼아 쌓은 석축 사이에 희고 붉고 분홍빛의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무성하지 않은가. 키들은 어찌나 크게 자랐는지 석축 위의 장미며 석축 사이에 피어있던 영산홍은 보이지 조차 않는다. 형님이 식물들은 수확하기 전 잠깐 사이에 부쩍 커진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가을바람이 불자마자 코스모스가 이때다 하고 맘껏 풍성한 성장을 하며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워 낸 것이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는지라 그 날은 더 이상 코스모스에 관심을 쏟을 형편이 아니었다. 죽 집을 둘러보았다. 가기 전에 비실비실해서 걱정이 되던 무궁화가 총 여섯 그루였는데 모두 훨씬 싱싱해져 있었다. 올해는 비록 꽃을 못 피우더라도 내년을 기약할 정도는 되어 보였다. 집을 떠나기 전에 나무 주위의 잔디를 제거해서 영양을 잔디에 뺏기지 않도록 한 것이 무엇보다 주효한 것 같았다. 게다가 영양과 방제를 위해서 막걸리와 진딧물 약까지도 소홀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고 보니 보상을 받은 듯 절로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갖가지 품종과 색깔의 무궁화가 앞마당과 뒷마당에 활짝 피어 있다. 내년엔 드디어 무궁화 꽃동산이 될 것 같다. 전부 해서 70그루나 된다. 물론 배롱나무 꽃들도 만개했다. 모두 다섯 그루, 텃밭은 또 어떤가? 키가 2미터가 넘는 칸나가 두 달째 붉은 꽃을 활짝 피워 주고 있다. 전부 12그루, 4월에 형님이 조그만 알뿌리 여러 개를 주었고 시험 삼아 그냥 조금 흙을 파고 심어 본 것인데 자리가 좋았던지 시원하고 푸른 잎을 활짝 펴고 붉은 꽃을 미사일처럼 뾰족하게 하늘을 향해 쏘아대고 있는 것이다.
다음날, 정원을 맡아 돌보아 주는 조경회사 사장님이 왔다. 사실 동림원 예정지 앞에 한 겨울에 옮겨 심어 놓은 홍송이 조금 이상해서 오시라고 한 것이다. 사장님은 소나무가 솔잎혹파리병에다가 나무좀병까지 걸린 것 같다고, 곧 방제를 하겠노라고 말한다. 병든 소나무를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다. 사장님은 또 코스모스 수세가 대단하다고 말하면서 영산홍 옆에 꽃 잔디를 새로 심어 놓았다는 얘기를 한다. 하긴 작년에도 코스모스가 대단했다. 올해만큼은 아니지만. 꽃이 다 지고 나서는 검은 씨가 길 위에 까맣게 깔려 빗자루로 쓸어야 할 정도였으니, 올해 다시 이렇게 성한 것이다. 아무래도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았다. 키 큰 코스모스는 사실 우리 집 같은 고즈넉한 한옥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 코스모스를 밀치고 보니 영산홍이 왜소하게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꽃 잔디는 옆으로 퍼지기는커녕 오그라든 모습이 짠하다. 결국 코스모스를 전부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하루 종일 일했다. 큰 놈은 옥수숫대만큼 컸다. 석축 사이에 자리 잡은 뿌리를 뽑으려고 하니 쉽게 흔들리지도 않았다. 톱이 등장했다. 엄살 보태서 거의 벌목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건강하고 아름답게 피어난 코스모스를 내가 전부 없애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미안해, 코스모스야. 어쩌니? 너희들이 있어도 될 곳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꽃은 전부 베어 회관에도 보내고 아픈 아지매한테도 보내고, 이웃집에도 보내고 형님에게도 주었다. 물론 우리 집도 코스모스 꽃 천지다. 꽃병마다 코스모스 꽃을 꽂았다, 연약해 보이는 코스모스 꽃대가 물속에 있는 채로 싱싱하게 며칠을 간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코스모스 꽃은 모두들 좋아한다. 덕분에 많은 분들에게서 칭송을 들었다. 회관에 있는 할머니들은 씨가 생기면 달라고 하신다.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나 텃밭에 있는 것들은 아직 남아 있으니 늦가을에 씨를 드릴 수 있다. 내가 봄에 혼자서 마을 안 길 곳곳에 애쓰고 심었는데 차라리 할머니들에게 씨를 나눠드릴 걸. 그랬으면 마을 곳곳에서 더 많은 코스모스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직까지 부끄러움을 타서 그렇다. 혹시나 꽃을 싫어하는 분들이 있을까 조심스럽기도 하고. 다행히 이 곳 할머니들은 분명히 좋아한다. 씨까지 달라고 하지 않나? 지나가면서 집을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모두 한 두 그루의 꽃나무가 있다. 아니면 과일 나무라도 있다.
항상 농사일을 도와주는 형님은 내가 준 코스모스에 얼굴이 환해진다. 형님은 내가 생수 2리터짜리 물통 목 부분을 가위로 쓱쓱 잘라 넓게 해 놓고 물을 부은 다음 코스모스 꽃을 가득 담아 드렸더니 집에 가져가 휴대폰 사진을 찍고 생수통이 예쁜 유리 꽃병 같다면서 다음날 사진을 보여 준다.
형님하고는 내일 시금치 씨를 뿌릴 예정이다. 뾰족한 별모양이라 만지면 손이 따가운 시금치 씨. 조금 일찍 심으면 겨울이 되기 전에 시금치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곧 텃밭 한 쪽이 시금치 밭이 된다는 얘기다. 내가 좋아하는 시금치.
이젠 전처럼 씨를 뿌리는 것이 겁나지 않는다. 내 노고를 알아주어 싹이 날 것 같으니 말이다. 아니면 또 어떠랴. 다시 심기도 해야지. 무궁화처럼 애쓴 보람을 가지게 해 주는 놈도 있고, 잠시 해찰한 틈에 예상 외로 거대하게 기세를 떨치는 코스모스 같은 놈도 있다는 걸 알았다. 이제 이 코스모스란 놈은 우리 앞뜰 남쪽 석축에서 영구 추방의 명령을 받았다. 내년에는 영산홍이 좀 더 건강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꽃 잔디가 잘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애를 쓸 것이다. 그러면서 우아한 정원의 모습을 갖춰 나가겠지. 그 때까지 미안하지만 코스모스가 잡초의 한 종류처럼 제거 대상의 리스트에 올라 있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작가>
조은경 약력
△2015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소설 '메리고라운드' '환산정' '유적의 거리' '아버지의 땅'등 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