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경 작가
▲ 조은경 작가

 

2020년도의 새 날이 밝았다. 양력 정초라면 겨울의 한 복판이다. 음력 설 정초까지가 깊은 겨울이다. 진짜 겨울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때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마실을 다닌다. 사람들과 만나는 일, 말이다. 서울에서는 친구들과 전화해서 서로 좋은 시간을 고르고 난 다음, 찻집이나 음식점을 정해서 만나러 나간다. 만나러 가는 장소는 더 이상 서로의 집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여전히 집으로 방문한다. 집으로 방문하니까 더욱 정겹다. 외출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손님을 접대하는 점도 편안하다.

이번 달엔 중요한 방문객이 몇 분 있었다. 우리 부부가 준비하고 있는 동림원의 설계를 맡아주기 위해 서울서 일부러 내려와 준 과일 박사 최 동용님이 있었다. 우리가 심으려고 하는 과일 묘목에 관련된 책자를 여러 권 선물로 가지고 왔다. 다음은 본인도 과수원을 하고 있으면서 우리 부부의 과일 나무 정원에 흥미를 가지고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털어내어 동림원의 기초를 다지는데 조언을 주는 젊은 이장, 이 영수님이 있었다.
 
그는 말하자면 시골에서 바라마지 않는 젊은 농업인이라 할 수 있다. 동림원 예정지 현장에서 토목 관계로 직접 조언을 주기도 했지만 오늘은 전체적인 식목에 있어 꼭 필요한 조언을 해 주었다. 즉 과일 나무들이 정원의 모습으로 나타나려고 한다면 밀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촘촘히 심으면 질병에 취약하니 과일나무간의 간격을 넓게 잡으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들라면 스토리가 있는 정원을, 또는 테마가 있는 정원을 조성 단계에서부터 기획하라는 것이었다.
 
이장님이 떠나자 새로운 불빛이 반짝 켜지는 느낌이었다. 통찰력 있는 젊은 이장의 방문이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었다. 이름부터 바꾸기로 했다. 전에는 동림원의 부제를 –과수 박물관-이라 부르려 했지만 지금은 –과일나무 정원-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향기로운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어여쁜 정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과일들에게서 높은 소출을 기대한 바가 없고 다만 어린이들을 위시한 방문객들에게 갖가지 과일 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려는 목적이었으므로 우린 쉽게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바닥엔 잔디를 심는 거야.-
-그 넓은 곳에 전부? 과수원 바닥에 잔디를 심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게........우리 동림원은 보통 과수원이 아니고 과일 나무 정원이기 때문이지. 정원에 잔디를 깔고 싶어, 과일 나무를 심을 곳과 산책길, 그리고 산책 길가에
꽃 심을 곳은 빼고 말이지.-
 
이런 생각 후에 나는 다시 과일 나무의 종류를 셈해 보았다. 다 해서 20가지 였다. 동림원에 20 군데의 과일 나무 빌리지가 생기는 것이다.
잔디 위에........정말 근사한 일이 아닐까?
 
또 한 분 멋진 인물이 방문했다. 남편의 학교 후배로 가끔씩 우리를 방문해 주는 분이 친구와 같이 왔는데 그 친구 분이 자신을 테너라고 소개하며 씨디 하나를 건네준다. 국내 유수의 음악대학과 이탈리아의 음악원을 정식 졸업한, 수많은 오페라에서 주역을 한 백 용진 씨가 그 분이다. 깜짝 놀랐다. 동림원이 개원하게 되면 노래를 불러 주시겠다고 미리 약속도 해 주었다. 이럴 수가!
 
다음 주에 우리 부부는 방문객이 되어 같은 고경면에 사는 두 분 이웃을 방문하러 갔다. 첫 번째는 고도리 와이너리의 최 사장에게다. 전부터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 와이너리의 와인을 선물로 받아 마셔 본 기억도 있어서 궁금했었다. 이장님과 함께 방문했다. 최 봉학 사장은 영천 토박이로 27년 전에 귀향해서 10년 전부터 고향의 명물 영천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데 신명을 바친 인물이다. 그 곳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와인 8 종류를 모두 시음하도록 해 주었다.
 
흐음... 내가 마셔본 바에 의하면 레드 종류를 빼고 모든 와인이 합격점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곳의 화이트 와인은 이미 수많은 품평회에서 수상해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진 제품이지만, 시음한 바, 복숭아 와인이라든지 아이스 와인이라든지 스파클링 와인 등 특수 와인도 세계 유명 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방문해서 시음해 본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와이너리의 와인과 비교해서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사장님은 레드의 품질을 높이는 데에도 도전해 보고 싶지만 기회를 보고 있다고 말씀했다. 아마 최 사장의 열정이라면 언젠가 그 일도 이루어낼 것이라고 믿는다.
 
다음은 우리 마을에 들어올 때면 언제나 지나가는 첨단 비닐하우스 온실이 있는 서원 농원의 김 형수 사장 댁으로 갔다. 호국로 큰 국도로 나가기 전에 항상 지나는 길인데 언젠가부터 온실 안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한라봉(?) 아니면 천혜향(?)일 것 같은 주황색 큰 과일이 내 눈을 끌었던 것이다. 아! 나는 역시 과일의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이 가는 사람이라는 것이 또 한 번 증명되는 일이지만.
 
남편을 졸라서 아는 분에게 소개받아 시간 약속을 하고 방문했다. 김 사장님은 유리 온실이 아닌 비닐 온실임에도 두께가 1.5센티의 특수재질로 방염, 방풍에 강하고 투광도 아주 좋다고 설명한다. 일조량이 많은 덕분에 영천이 위도 상으로는 남쪽인 제주도와 연료비 차이가 별로 안 난다는 파격적인 말씀을 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옛날 사과 과수원이었던 넓은 땅에 25년 전부터 편백을 심어왔다는 얘기도 해 주었다. 안쪽으로 또 하나의 비닐하우스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놀랍게도 커피, 파파야, 바나나 등 열대 과일이 무성했다. 빨갛게 익은 커피 열매를 보여 주고 로스팅 머쉰과 브루잉 머쉰을 보여 준 것은 사모님이다. 두 분은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농촌 체험 프로그램을 시켜 준다고 했다. 우리 고경면 안에 이렇게 자랑스러운 농업인들이 있다니, 가슴이 뿌듯했다.
 
오늘, 겨울이 깊은 밤, 백 용진 테너의 아름다운 우리 가곡을 들으면서 제주 산보다 더 향기로운 한라봉을 안주로 고도리 와인을 마시고 있다. 시골에 내려와서 이렇게 멋지게 사는 사람, 어디 나와 보라고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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