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경 작가
▲ 조은경 작가

 

아침에 텃밭에 나갔다가 칸나의 뾰족한 순이 제법 큰 돌을 밀어낸 채 힘겹게 견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돌을 치워 주었다. 책에서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보기는 처음, 생명의 힘을 느낀 새로운 발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얘기하고 있다. 그 중에서 21세기는 2020년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는 어떤 학자의 논리가 특이했다. 그 논리는 20세기는 1919년 1차 세계 대전이 끝나던 해에 시작했다고 보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이제 우리는 세계화와 자유무역, 5G로 대표되는 20세기에 안녕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시대? 무슨 새로운 시대? 그 질문에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답이 있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세상은 앞으로만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코로나라는 복병을 맞아 세상은 뒷걸음질하기도 한다는 것을 새로이 느꼈다. 모두들 앞으로의 세상은 코로나 전의 세상과는 분명히 달라질 것이라고 예측을 하지만 어떻게 달라질지 누구도 확실히 말하지 못한다.

지난주에 집 근처 단포에 있는 –북촌 한식-이란 채식 음식점에 갔다가 책 여러 권을 빌려 가지고 왔다. 그 집은 도서관이 아니고 음식점이지만 좋은 책이 많이 비치되어 있다. 음식이 나올 동안 들춰보라고 아마 주인장이 갖춰 놓았을 것이지만, 그 책들은 –행복한 우리 집-이라든가 –노블레스- 같이 눈요기로 보는 책이 아니다. 그 중 –세상의 끝을 넘어서-라는 책을 읽었다. 1519년에 출항한 마젤란의 세계 일주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부제는 –마젤란의 해양 오디세이- 로렌스 버그린 지음, 박은영 번역, 해나무 출판.

책에서는 15-16세기에 유럽인들이 인도 항로 및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던 대항해 시대를 –발견의 시대- 라고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알고 있던 그들이 몰랐던 세상의 반쪽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충격이었겠는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래서 발견이란 표현을 썼다. 지금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세상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옛날에도, 지금도,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그 가치를 몰랐고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던 그것이 아닐까.

최소한 이젠 찾으려 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인들에게서 떨어져 자가 격리를 하는 와중에 스스로가 발견하고자 하는 가치는 어쩌면 오랜 동안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왔던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가족의 가치, 자신의 내면으로의 침잠, 진정한 삶으로의 회귀 같은 것 말이다.

16세기 –발견의 시대-에서 마젤란은 자신의 조국인 포르투갈의 왕 마누엘 1세에게서 후원을 받지 못하자 이웃 나라 스페인으로 국적을 바꾸어 그 나라 왕 카를로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지원을 받아 항해를 떠난다. 그런 이유로 두 나라 선원으로 구성된 선단에서 계속 반란이 일어나고 목숨을 위협받는 어려운 처지가 된다. 5척의 배와 260명의 선원을 이끌고 스페인의 세비야 항을 떠나지만 3년 후 돌아왔을 때는 난파 직전의 단 한 척의 배에 빈사 상태의 18명의 선원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얼마나 험난한 것이었을까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앞에 말한 선상 반란 뿐 만 아니라 영양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 폭풍우, 해적, 식인종이나 원주민과의 접촉,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한 고투와 더불어 목적이던 향료섬까지의 항로 발굴 등이 그려진다. 탐사를 위해 왕의 후원을 얻기까지 보여준 마젤란의 불굴의 의지도 대단하다.

항해 도중 필리핀의 막탄 섬에서 원주민들에게 살해되었지만 마젤란의 여정이 역사에 남은 이유는 이 모든 사실을 꼼꼼히 기록한 피가페타 라는 작가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들 틈에 있었다는 사실, 그가 총사령관 마젤란에게 끝까지 충성했으므로 긍정적인 기록을 남겼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더 중요한 일은 마젤란 이후에도 많은 탐험가들이 항해를 떠났지만 대부분 다 실패했다는 사실이 그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이제 현대의 우리는 끝없이 달려가던 문명의 폭주 한 가운데서 강제적으로 휴지를 맞았고 생존을 모색하며 새로운 –발견의 시대-를 열고 있다. 세계화, 대량 생산의 시대는 다시 안 올 지도 모른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명제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유 튜브의 한 작가는 –대박 대신 완판의 시대- 라는 말을 썼다. 눈금도 다양해지고 전문화 되고 있다고도 말한다. -소확행- 이란 말은 이전부터도 조심스럽게 나온 말이다.

날로 확장해가던 보여주는 문화에도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명품의 소비도 줄고 수도권의 사무실도 조금씩 비용이 싼 지방으로 옮겨 갈 수 있다. 어차피 화상회의로 간다면 세가 비싼 지역에 꼭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다면 좀 더 실질적이 될 수 있다. 외부의 통제가 기능을 잃어 가면 스스로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교육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실질적인 교육만 남기 때문에 꼰대 문화도 사라지고 왕따도, 학교 폭력도 사라질 것이라고.

모두가 원하는 일만 일어나는 결과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코로나 사태로 가장 귀중한 인명의 손실을 껴안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었을까. 두려움에 가득 찬 앞날을 응시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발견-을 모색하고 있다.

코로나 덕분에 미래가 앞당겨졌다고 혹자는 말한다. 그것이 바람직스러운 미래가 되려면 –발견의 시대-에서처럼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이 필요할지 모른다. 물론 지금이 16세기 항해의 시대처럼 탐험이 탐험가의 것만이 아닌 점이 다르다. 모든 사람들이 탐험가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고통과 희생이 모두 나눠지고 열매 또한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 해서 진짜가 확인되고 인류가 그 진짜를 향해 가는 미래가 도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