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석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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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때일수록 나누고 돕는 이해·배려, 상생·온정의 美德 절실
예년 같으면 고향에서 부모님과 형제 자녀 등 온 가족이 모여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유난히 밝고 둥근 한가위 보름달을 바라보며 함께 보낼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겠지만 올해엔 이런 기대 대신 감염병 확산에 대한 우려가 앞선다.
올 초부터 시작된 국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추석을 앞둔 지금까지도 감염 확산세가 뚜렷하게 수그러들지 않으면서 2020년 추석은 집단감염의 불안 속에서 맞이하는 ‘코로나 추석’이 된 모양새다.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은 설과 한가위다. 특별히 한가위는 절기가 오곡백과(五穀百果)가 익어 수확을 거두는 계절이라 먹거리가 풍성해서 넉넉한 마음을 갖게 한다 하여 인심이 넘치는 ‘명절 중의 명절’로 꼽힌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설 명절보다도 한가위 추석명절을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 같다. 하지만 올해 추석은 전에 없이 우울한 분위기다.
추석이 임박했는데도 전통시장 상인들은 추석 대목경기가 실종됐다고 울상이고, 서민들은 생활이 갈수록 궁핍해진다며 아우성이다.
지난 1월 20일 첫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시작된 코로나19와의 ‘전쟁’, 사상 최장기간의 기록적인 장마(54일), 10일 남짓 사이 세차례나 한반도를 통과한 태풍 등 일찍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재난(災難)으로 한가위 분위기가 썰렁하기만 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역대급 삼중고(三重苦)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피폐해진 살림살이는 물론 심신(心身)이 크게 지쳐있는 상황이다.
상인들은 올해 같은 불경기는 처음 본다고, 농민들은 벼농사는 물론 채소 과일 등 각종 농산물이 냉해와 침수 낙과 등으로 흉작을 면치 못했다며 하늘을 원망하고 있다.
당연히 농축산물 가격도 덩달아 올라 서민들의 먹거리와 제수용품 구입 등 가정경제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살림살이 관련 지표(指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달 초 올해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코로나19의 2차확산이 없는 경우 작년보다 1.8% 감소한 1천884조8천억원을 나타낼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 생활수준과 직결되는 지표인 1인당 국민소득(GNI)은 지난해 3만2천115달러에서 2만달러대로 내려앉을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올해 우리 경제의 역성장이 현실화된 가운데 추석 특수도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이 지난 7월 올해 성장률을 –1.3%로 전망한데 이어 KDI(한국개발연구원)도 1%대(–1.1%) 역성장을 예상했다. 우리 경제가 역성장한 것은 외환위기 시절인 1998년(–5.1%) 이후 22년 만의 일이다.
또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고용 충격으로 지난달 신규실업자가 60만명을 넘어섰다. 이는 같은 달 기준으로 2010년(66만1천명) 이후 10년 만에 최대 수준이다.
코로나19 확산 우려와 ‘사회적 거리두기’ 여파로 구직활동에 나서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 신규실업자가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달 16일 통계청이 발표한 구직기간별 실업자 통계에 따르면, 지난 7월 구직기간이 3개월 미만인 이른바 ‘신규 실업자’의 수는 1년 전보다 7만3천명 늘어난 60만6천명으로 집계됐다.
특히 지난 7월 실업자 수는 1년 전보다 4만1천명 늘어난 113만8천명으로 외환위기 직후(1999년) 21년 만에 최악을 기록했다.
이미 코로나 사태로 영업을 접는 소상공인들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 실제로 올해 2분기 폐업 상가 수는 10만 곳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상공인연합회의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절반 이상이 ‘사업을 유지하고 있지만 폐업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고 답했고, 22.2%가 ‘사실상 폐업 상태’라고 밝혔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2개 주요 골목상권 업종을 대표하는 협회(조합)를 대상으로 ’2020년 상반기 경영실적 및 하반기 전망'을 조사한 결과, 올해 주요 골목상권 업종들의 하반기 순익은 전년 동기 대비 42% 줄어들고 코로나 상황 악화 시에는 52.6% 이상 급감할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골목상권 업종들의 전년 동기 대비 2020년 상반기 매출액은 평균 –27.2%, 매출액에서 임대료·인건비 등 제반비용을 차감한 순익은 –32.9%였다.
코로나 사태로 전대미문의 위기를 겪는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올해 추석 상여금 또한 조사를 시작한 2012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소기업의 상여금은 대기업의 절반에 불과해 갈수록 대기업과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기업 1140개사를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올 추석에 상여금을 지급한다고 답한 기업은 51.3%로 절반가량에 그쳤다. 지급하는 상여금은 평균 58만6000원으로 지난해(64만7000원)보다 6만1000원(9.4%) 줄었다.
코로나 감염 우려와 경기침체로 고향 가기를 포기한 국민들도 전례없이 크게 늘었다. 코레일이 추석 승차권 예매를 실시한 결과 전체 좌석의 23.5%인 47만석이 판매되는데 그쳤다. 이는 지난해 85만석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직장인 855명을 대상으로 가진 ‘올해 추석을 어떻게 보낼 건가?“라는 설문에 직장인 30.8%는 ‘여행이나 외출을 삼가고 최대한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집콕)’, 28.8%는 ‘부모님 댁만 다녀올 것’이라고 응답했다.
추석연휴 동안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올 것’이라는 응답자는 5.1%로 10명 중 1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처럼 코로나 감염 우려로 이동을 자제하고 소비를 줄일 계획을 세우면서 올해 추석 대목은 옛말이 됐다.
한마디로 코로나19 감염 우려로 귀성(歸省)과 벌초 성묘 등의 활동이 원격(遠隔) 비대면(非對面) 온라인 대행(代行) 등으로 대체 되면서 사람들이 접촉과 왕래를 기피하는 바람에 1년 중 가장 기대하는 추석명절 대목마저 직격탄을 맞는 양상이다.
정부가 고향 방문 자제를 호소하면서도 자영업자들의 숨통을 다소나마 터주기 위해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14일부터 2.5단계에서 2단계로 하향 조정한 것도 경제살리기를 위한 고육책(苦肉策)이다.
또 김영란법에 따른 농수산물 및 농수산 가공품 선물가액 상한을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올리고 온누리상품권 구매한도를 50만~7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상향하는 등 추석 내수 진작에 열을 올리고 고향 방문 대신 선물로 마음을 전하는 ‘선물 보내기 운동’을 펴고 있는 것도 같은 취지다.
지난 3월 20일, 유엔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발표한‘2020 세계행복보고서’의 ‘국가별 행복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153개국 중 61위로 지난해보다도 7단계 더 하락했다.
2016년부터 줄곧 50위권을 기록해오다가 올해는 그마저도 유지하지 못하고 60위권으로 밀려난 결과다. 국가별 행복지수는 1인당 GDP, 사회적 지원, 기대 수명, 사회적 자유, 관용, 부정부패,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7개 지표를 기준으로 산출한다.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핀란드다. 핀란드는 3년 연속 1위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 뒤를 덴마크 스위스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웨덴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등이 잇는다. 핀란드를 포함해 다섯 개 나라가 북유럽 국가들이다. 북유럽 국가들의 행복지수는 왜 그렇게 높을까.
핀란드의 경우는 탄탄한 사회 안전망과 높은 수준의 복지체계가 행복지수를 높이는 비결로 꼽히지만 눈길을 끄는 내용은 따로 있다. ‘코로나가 각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 공동체들이 서로를 도우려는 높은 의지가 행복지수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줬다’는 미국 CNN의 분석이다.
세계행복보고서도 ‘신뢰도가 높은 사회에서는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번졌을 때 피해를 줄이고 더 나은 삶을 위해 협력할 방법을 찾는다’며 ‘이웃과 기관이 서로를 도우려는 의지가 강하면 소속감을 높이고 자부심을 갖게 해 재정적 손실을 보상할 만큼의 이득을 준다’고 조언한다.
9개월째 계속되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고물가와 경기침체, 취업난 등으로 힘들어진 경제적 형편 때문에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사회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상황이다.
이번 추석 기간 동안 팍팍해진 일상의 무게를 툭툭 털어내고 여유로움과 넉넉함을 느끼면서 에너지를 재충전, 분위기 반전(反轉)을 통해 신명나는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
과거 우리 선조들의 한가위 세시풍속(歲時風俗) 중 하나인 ‘중로상봉(中路相逢)’의 지혜와 정신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중로상봉(中路相逢)’은 ‘중로(中路)보기’, 특히 ‘반(半)보기’로도 불렸다. ‘반보기’의 뜻은 원래 추석 무렵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두 집 사이의 중간쯤 되는 산이나시냇가 같은 곳에서 만나 장만해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회포를 풀던 풍속을 일컫는다.
‘반(半)보기’의 어원은 친정과 시댁의 중간지점이라 반(半), 보고 싶은 가족을 다 만나지 못하니 반(半), 하루 중 반(半)나절밖에 못 만나고, 눈물이 앞을 가려 얼굴이 반(半)밖에 안 보여서 이렇게 불리어졌다는 얘기다.
유학(儒學)을 신봉하던 조선시대 전통적인 가족제도 아래서 여자는 한번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 하여 친정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요즈음과 달리 길이 험하고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으니 친정 한 번 가려면 큰 마음을 먹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추석 명절에 친정 나들이의 ‘절반의 꿈’을 마련한 조상의 슬기가 새삼 놀랍다.
‘반보기’는 엄혹한 현실에서 한 줄기 시원한 바람같은 한가위다운 일종의 ‘숨통트기’이자, ‘나눔’과 ‘친교(親交)’의 장(場)이 아닐까.
이 ‘온보기’가 아닌 ‘반보기’에서 온전히 한 쪽에서 모든 것을 부담하거나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절반씩 나아가고 물러서는 ‘양보(讓步)’와 ‘절충(折衷)’의 정신을 읽는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이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바로 ‘중로상봉’의 정신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우리 사회는 이념(理念)과 계층(階層), 노사(勞使), 세대(世代), 빈부(貧富)간 갈등이 전에 없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번 추석은 비록 코로나 19사태로 ‘비대면 명절’이 현실화되고 있지만 마음과 온정 만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진정으로 서로 나누고 양보하는 ‘화합(和合)의 한바탕 축제’가 됐으면 좋겠다. 그것이 선인(先人)들의 ‘반(半)보기’와 ‘중로상봉(中路相逢)’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