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기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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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로는 국민 스포츠 정착 요원하다
구한말 일본을 통해 수입된 당구는 일제 식민통치를 거쳐 널리 보급됐으나 초기부터 음주와 흡연 도박의 그림자가 당구장에 드리우면서 심하게 말하면 폭력배나 도박꾼들이 자주 찾는 유해시설로 여겨졌다. 그러나 광복 후 사회가 안정을 찾고 경제성장과 함께 당구인구 저변이 확대되면서 여건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1993년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18세 미만 출입제한 규제가 풀리자 여가활용과 교육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일부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당구를 학교체육으로 육성하기 시작했고 세계선수권과 월드컵대회 등 주요 국제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정상을 차지하면서 위상과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2017년 말 금연이 실시돼 당구장 분위기는 더욱 밝아졌다.
어린 나이에 당구에 입문한 유망주들이 학교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세계무대 진출에 성공해 그 뒤를 따르는 후배들이 줄을 잇게 됐다. 이른바 당구키즈다. 당구장 영업과 테이블과 큐, 공 등 관련 용품의 제작, 유통을 합한 시장규모가 2조2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될 정도로 급성장했다. PBA 출범과 함께 기업후원이 가세해 남자투어 우승상금이 1억원에 달하고 출전선수도 급증했다. 학교체육을 통한 유망주 육성과 함께 PBA 스타 탄생으로 꿈을 키워주고 당구장 이용객 급증과 용품시장 확대로 이어지는 스포츠 산업화의 선순환이 눈앞에 다가온 기분이다. 올들어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무관중으로 투어가 치러지고 있으나 출범 당시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그러나 외형상 변화를 넘어 실상을 들여다보면 아직 극복해야 할 과제가 널려 있다. 당구장 분포는 세계 최고수준이라 하지만 무엇보다 당구 문화의 저변은 한참 떨어져 있다. 당구장에 들어서면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헷갈릴 정도로 왜색용어가 옹이처럼 단단히 박혀 있다. 당구공을 ‘다마’라 부르고 당구장에 가자는 말도 ‘다마 치러 가자’고 한다. 듣기 좋고 이해도 빠른 우리말 용어가 있는데도 ‘우라마시’ ‘다데까시’ ‘히끼’ ‘오시’ ‘다이’ 등 일본말과 국적불명의 용어가 판을 친다.
혹시 나이든 중년이나 노년층만 어릴 적 당구장에서 배운 습관이 남아 입에 달린 일본말을 쓰는 게 아닌가 싶지만 10대나 20대 청소년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공을 잘 치고나면 ‘기레이’라는 왜색 용어가 청소년들의 입에서 바로 나온다. 입문할 때부터 당구장에서 배운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저급한 용어가 난무하는 분위기에서 과연 당구가 국민의 사랑을 받고 건전하게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프로 스포츠로 뿌리내려 국산 장비며 용품시장으로 선순환이 확산되는 산업화가 이뤄질까 의문이다. 체계적인 훈련과 지도를 받아 성장해야 할 어린 선수들 역시 스포츠 국적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물론 공식 경기와 해설, 방송, 보도 등에서는 일본식 용어가 퇴출된지 오래다. 그러나 당구를 즐기는 동호인들이 왜색용어에서 탈피하지 못하면 당구 문화의 개선은 요원하다. 프로투어를 후원하는 기업들도 당구 문화의 바탕이 떨어지면 참여확대에 망설이게 된다. 후원하는 스포츠 종목의 수준이 기업 이미지에 바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활발하게 후원에 나설 수 있어야 프로구단 창설이 가능해지고 선수들의 훈련 여건도 크게 개선될 수 있다.
경기용어의 혼란은 왜색용어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당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130 여년이 지났다지만 방송중계 듣거나 책자를 눈여겨 보면 아직 당구용어가 정비되지 않았다. 3구나 4구 종목에서 큐로 치는 공을 ‘수구’ 또는 영어 ‘큐볼’로 부르거나 ‘내공’이라고 혼용한다. 3구 종목 경기자가 연속득점(보통 5점 이상)하면 ‘장타’라고 하는데 이 용어가 적합한지도 의문이다. 야구나 골프 등 다른 스포츠에서는 멀리 보낸 공을 장타라고 하지 연속득점을 지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구 종목의 맏형격인 대한당구연맹(KBF)과 PBA는 경기용어 통일과 일본말 추방을 위해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유관단체들은 그동안 나름대로 용어순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지만 추진력이 부족했다. 당구장업주 단체와도 협력해 현장에서 왜색용어 추방 캠페인을 벌여 고객들에게 취지를 널리 알리는 한편 방송용어 등의 정비에도 나서야 한다. 경기와 방송 관계자들을 위한 자료제작과 설명회를 강화하고 모니터링을 통한 점검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당구계를 위한 외형의 인프라가 당구장과 이용고객이라 한다면 당구용어는 이들 인프라의 문화를 좌우하는 기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구가 프로화의 첫 과제를 넘어 국민 스포츠 산업으로 성공하려면 언어부터 그 정체성을 찾아야 가능하다. <투데이코리아 부회장>
필자 약력
△전)국민일보 발행인 겸 대표이사
△전)한국신문협회 이사
△전)한국신문상 심사위원회 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