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직 논설주간
▲ 권순직 논설주간
법이나 규정 등 각종 규범은 반드시 지킬 것을 전제로 하고 만들어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만들 때부터 이 핑계 저 구실을 마련해 놓고 빠져나갈 궁리부터 한다면 정상이 아니다.
 
정부가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최근 마련한 재정준칙이 그 꼴이다. 시행해 보기도 전에 갖가지 예외조항을 둔다든가, 시행시기도 한참 뒤로 미루고, 강제성도 의무규정도 없이 완만하게 만든 준칙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따라서 기획재정부가 마련한 재정준칙은 실효성도 의문이고, 도입 의도도 불투명한 ‘맹탕 준칙’ ‘꼼수 준칙’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다.
 
국가채무가 일정 수준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여 재정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각국이 운용하고 있는 제도가 바로 재정준칙이다.

포퓰리즘성 방만한 재정운용을 막을 장치가 바로 이 준칙의 도입과 엄격한 운영일 터이다. 그런데 도입부터 이처럼 구멍 숭숭 뚫리고, 예외조항 미리 마련한 준칙은 시작부터 실망이다.
 
구멍 숭숭 뚫린 준칙
 
준칙의 핵심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60%이하로, 통합재정수지는 -3% 이내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40%를 마지노선 삼아 국가채무관리를 해오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후퇴다. 또 적자폭 한도로 ‘관리재정수지를 -3% 이내’를 내부규정으로 삼아왔다.
 
이를 이번 준칙에서는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성 기금을 합해 ‘통합재정수지 -3%이내’로 정했다. 흑자를 내는 기금을 더해 산출한 한도 -3%는 사실상 -5%로 늘어난 것이다. 그래서 꼼수산식(算式)이라는 말이 나왔다.
 
시행시기는 2025년으로 이 정부 임기가 지난 뒤이다. 자기들은 돈 풀어도 규제 안받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경제성장률이 둔화하거나 고용이 부진하는 등 경제위기 또는 경기 둔화시에는 적자 비율 기준을 최장 3년간 크게 완화할 수 있게 예외조항을 뒀다.

단어 자체가 추상적이고 포괄적이어서 준칙이 허술하다는 평가다. 정치논리로 돈을 푸는 포퓰리즘 정책이 가능토록 길을 열어놓은 셈이다.
 
또 준칙을 법률이 아닌 대통령시행령으로 정해 5년마다 변경이 가능토록 한 것은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강제성은 커녕 신축성이 너무 강하다.

일부 국가처럼 헌법이나 법률로 재정준칙 준수를 강제하지 않고 느슨한 장치를 둠으로써 있으나 마나한 재정준칙이라는 지적이다.
 
준칙 강제성 강화하고 예외조항 없애야
 
현재 117개국이 재정준칙을 운영 중이다. 독일의 경우 ‘신규채무는 GDP대비 0.35% 이내로 제한한다’고 헌법에 명시했다. 프랑스는 ‘재정수지 적자를 GDP의 0.5% 이내로 관리한다’고 법률로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각국이 국가채무관리를 엄격히 관리하는 것은 그만큼 재정의 안정적 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늦게나마 재정준칙을 마련키로 한 정부 방침에 기대를 걸었으나 발표된 준칙안에 실망이 크다.
 
이 정부 들어 국가채무 관리가 크게 느슨해졌다. 최근의 코로나 사태에 따른 비상 재정상태 이전부터 포퓰리즘적 재정운용이 심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대표시절엔 “재정 건전성을 지키는 마지노선인 40%가 깨졌다”며 재정 건전성을 강조, 정부를 질타했다.

집권 후 문대통령은 “40%의 근거가 뭐냐”며 집권전의 태도에서 정반대로 돌아섰다. 돈을 풀어 정권을 유지한다는 전략이라는 비판에 할 말이 없게 됐다.
 
국가재정수지가 급속히 악화하면 국제사회에서 나라의 신뢰도가 추락한다. 외자도입이 어려워지고 외국인의 국내투자 회수가 진행된다. 그런 가운데 최악의 경우 채무불이행 사태가 올 수도 있다. 국가부도이다.
 
그러한 길을 걸은 나라의 예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80년대 멕시코 브라질 칠레 등 남미 국가에서 발생한 외채위기는 정부의 방만한 재정지출, 이에 따른 국가채무비율의 급증에서 비롯됐다.

그리스 스페인 아일랜드 등 유럽의 몇몇 국가의 예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경우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와 그 후 국제 외환위기에 직면해서도 잘 견뎌낸 건 허리띠 졸라매면서 안정적 재정운용으로 국가채무비율을 잘 관리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계속 재정운용을 방만하게 해나간다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안하다.
 
정부가 기왕 제시한 재정준칙이니만큼 더 중지를 모아 효율적인 준칙으로 강화해야 할 것이다. 법률로 국가부채의 증가를 엄격히 규제하고, 예외조항을 과감히 철폐해 갖가지 빠져나갈 구멍을 없애야 한다.
 
국가부도에 이른 남미국가나 그리스 같은 비극을 우리 후대에 물려줘선 안된다.

재정준칙 마련을 주도했거나 참여한 경제부총리를 비롯, 청와대 관련 비서관, 각 부처 관리들, 여당 관계자, 관여 학자 등등의 명단을 작성하여 역사에 남겨둘 것을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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