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민·개혁의 憂國衷情에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다

▲ 강원대 외래교수 류석호
▲ 강원대 외래교수 류석호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 동안 전남 강진 해남 진도 3개 지역을 다녀왔다.

오랜 코로나 역병(疫病)으로 힘들고 찌든 심신을 오랜만에 치유하는 환상적인 여행이었다. 그것도 산천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성큼 다가온 봄을 실감할 수 있는 4월 초순 호시절에 1년 3개월 만에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한 꿈같은 나들이였다.

함께 여행을 마친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기대 이상의 기념비적 여행이었다”며 “다음엔 남도에서 한달살이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먹고 자고 마시고 보고 듣고 즐기고 배우는 것이 모두 대만족이어서 이른바 ’가성비(價性比)‘와 ’가심비(價心比)‘를 두루 갖춘 여행이란 평가다.

일주일 내내 맑게 개인 하늘과 따뜻한 햇살, 깨끗한 공기도 행운이었고, 비취빛 서해·남해 바다와 다소곳한 산세, 넓고 기름진 들판,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채밭과 녹차밭 대나무 군락(群落), 비록 끝물이지만 동백과 벚꽃들의 향연(饗宴)도 볼만했다.

특히 사흘은 월출산 남쪽 성전면 월남리 달빛마을한옥촌에서, 나머지 사흘은 강진읍 사의재길 힐링하우스에서 안주인의 넉넉한 인심 덕에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복이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오랜 기간 여행다운 여행을 못한 비원(悲願)을 풀기라도 하듯 참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서울에 돌아올 때까지 승용차로 총 거리 1,500km를 달리고, 하루 평균 2만보(12km)를 걸었으니까.

부부 두 쌍이 원팀을 이룬 남도 탐방객 일행은 강진군에서 마련한 ‘강진에서 일주일 살기’ 프로그램에 참가, ‘푸소(FUSO=Feeling Up Stress Off) 가정’에 여장을 풀기가 무섭게 승용차와 도보로 강진 뿐만 아니라 이웃한 해남과 진도를 돌아다녔다.

남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사실상 코로나 청정지역이어서 이래저래 복받은 땅인지라 별걱정 없이 쏘다닐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참 많은 것을 보고 즐기고 느끼는 값진 경험을 했다.

생전 처음 가우도(駕牛島) 바다 위 1km를 가로지르는 스릴 만점의 짚 트랙에 몸을 실어 보았고, 고려청자박물관에서 청자컵 만들기, 한국민화뮤지엄의 민화(民畵) 및 4D 가상체험도 신나는 활동이었다.

주요 여행지를 추려보자면 강진의 경우, 이밖에 영랑(永郎, 서정 민족시인 김윤식)생가와 세계모란공원, 사의재(四宜齋),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 하멜기념관, 월출산 남쪽 산록의 강진다원, 무위사(無爲寺), 월남사지(月南寺址), 백운동원림(白雲洞園林), 석문(石門)공원 구름다리, 백련사(白蓮寺), 다산초당, 다산박물관, 미량미항 수산시장 등을 둘러보았다.

해남에선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와 도솔암(兜率庵), 땅끝송호해변, 땅끝마을 전망대와 기념탑,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고택 녹우당(綠雨堂)을 찾았다.

진도에선 울돌목(鳴梁·명량) 이순신 장군 동상, 남종화(南宗畵)의 산실(産室) 운림산방(雲林山房, 명승 제80호).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이름난 뽕할머니의 전설이 깃든 신비의바닷길, 고려시대 대몽항쟁과 관련된 남도진성(남도석성·南桃石城)과 삼별초(三別抄)를 이끈 비운의 장수 배중손 사당(裵仲孫 祠堂) 정충사(精忠祠), 국립남도국악원 등을 답사했다.

서울에서 내려가는 길에 목포시 유달동 고하도(高下島)를 찾아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비축하며 전쟁을 대비하던 흔적을 더듬어보는 시간도 의미 있었다.

그러나 뭣보다 이번 남도여행의 백미(白眉)는 단연 민족의 위대한 실학자이자 경세가(經世家)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느끼고 배운 감동과 교훈이었다.

15년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나, 이번엔 결이 달랐다.

그동안 쌓인 연륜의 무게와 작금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가슴에 훨씬 큰 울림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사의재(四宜齋, 강진읍 사의재길 27), 다산초당(도암면 다산초당길 68-35)과 백련사(도암면 백련사길 145), 다산박물관(도암면 다산로 766-20), 백운동원림(성전면 월하안운길 100-63), 그리고 고산(孤山) 윤선도 고택 녹우당(綠雨堂,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5))을 답사하면서 거인(巨人)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다산초당을 기점으로 백련사까지는 숲길로 1.1km, 다산박물관까지는 900m, 사의재까지는 9.5km, 백운동원림까지는 28km, 그리고 윤선도 고택 녹우당까지는 20km 거리다. (도보 기준)

다산이 1801년 11월 23일 혹한 속에 강진에 유배왔을 때 사학죄인(邪學罪人, 천주교인)을 백안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다산을 알아보고 거처(골방)와 식사를 제공한 이가 동문 밖 주막집 노파와 그의 외동딸이었다.

이들 모녀의 따뜻한 손길이 아니었다면 다산의 운명이 어떠했을까. 다산은 주막에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집’이라는 의미의 ‘사의재’ 당호(堂號)를 내걸고 4년간 기거하며 노파가 모아준 학동(學童)들을 가르치며 틈틈이 공부와 집필을 했다. 지금은 당시 주막을 복원해 음식을 파는 강진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다산은 강진읍 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1808년 봄, 마침내 외가인 해남윤씨 윤선도(尹善道) 가문인 윤단의 호의로 강진만이 바라다 보이는 만덕산(萬德山) 남쪽 산정(山亭)이 있던 자리에 다산초당(茶山草堂)을 마련한다. 이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은 다산은 11년간 기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활동에 몰두한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다산의 대부분 저서가 다산초당에서 이루어져 명실상부 ‘실학의 산실(産室)’이 되었다. 외가 녹우당(綠雨堂)에서 가져온 1,000여권의 서적과 제자들의 도움에 힘입은 바 컸다.

다산초당 동쪽으로 100여m 산등성이에서 바라본 구강포(강진만) 앞바다. 다산이 독서와 저술에 지칠 때나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 형님(丁若銓)과 고향(남양주 마재)의 처자가 그리울 때 이곳에 서서 눈앞에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이곳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아 별칭으로 ‘다산(茶山)’이라 불렸다. 정약용의 호의 호(號) 다산(茶山)이 생긴 연유다.

천년고찰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에 이르는 숲속 오솔길은 열 살 아래 혜장(惠藏)선사, 24세 연하 초의(草衣)선사와 교류하던 사색의 길이었다. 당대 최고의 학승인 혜장선사와 후일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시서화(詩書畵)의 달인 초의선사는 제자이자 벗으로 자주 만나 학문과 예술, 시국담을 나누며 유배생활의 시름을 잊곤 했다. 특히 이들로 인해 차의 참맛을 알게 되면서 심신을 추스르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들 외에도 다산은 50세에 백운동원림의 차기 동주(洞主) 이시헌(1803~1860)이 아홉 살 때 제자로 맞아들인다. 이시헌은 후일 독특한 제다법(製茶法)으로 우리나라 차를 제조·보급한 선구적 다도인으로 유명해지는데, 두 가문의 ‘아름다운 의리’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다산은 제자를 두는데 연령과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강진 유배 처음 4년간 머문 동문밖 주막집 사의재에서 가르친 학동들은 아전의 자식이었다. 훌륭한 인품과 넓은 도량을 갖췄기에 가능한 일이다.

다산이 불세출의 실학자, 경세가, 경학자가 된 것은 외가인 해남윤씨 가문의 DNA와 깊은 관련이 있다.

양식과 묘사의 기법에서 독보적인 ‘자화상’(국보 제240호)과 민중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그려 조선 후기 풍속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가 다산의 외증조부. 윤두서는 농민 생활과 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개혁안을 제시하는 등 그림 외에도 천문 지리 수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책에서 말하는 이론에 매몰되지 않고 몸으로 체득하고 일로 증명하는 ‘실득(實得)’을 중시했는데, 이는 곧 실학정신의 중심이다.

윤두서의 학문은 시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은 증조부 윤선도로부터 이어지는 가학(家學)이었다.

윤선도 유물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이 가문이 경학, 시문학, 병법, 천문, 지리, 음악, 공예, 수학, 기하학, 의학 등에 대한 수 만권의 장서를 갖추고 연구와 관심이 연면히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이런 실득(實得)의 맥(脈)이 다산 선생에게 자양분이 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산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 정신이 대표적으로 빛을 발한 게 화성(華城·수원성 水原城) 설계와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이다.

다산의 빈틈없는 설계와 자세한 기록이 있었기에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화성은 후일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고, 거중기 등 신기술을 이용한 공법으로 건설비용을 4만냥, 공사 기간을 7년이나 단축했다는 평가다.

백운동원림과 다산과의 인연도 특별하다.

다산은 50세 이던 1812년 9월, 자연 절경에 원주이씨 병사공파 종가의 지혜가 어우러진 백운동원림(별서정원)에 남종화의 대가인 제자 초의선사, 몇몇 성인 제자와 첫 방문을 한다. 다산은 ‘월출산이 품은 비밀의 명품’ 백운동원림의 아름다운 풍경에 깊은 인상을 받아 백운동 12경(景)을 읊은 ‘백운동 12승사(勝事)’를 남긴다. 그리고 남종화의 대가인 초의선사에게 백운동정원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했다.

이때 지은 다산 친필 시와 초의 백운동도를 합쳐 만들어진 ‘백운첩(白雲帖)’은 다시 189년이 흐른 2001년 6월 재발견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토대로 조선 후기 차문화 중흥의 진원지 강진 백운동원림이 한국 전통정원의 백미(白眉)로서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 조선 최고의 사가정원(私家庭園, 이담로가 조성)이 2019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5호로 제자리를 찾은 배경이다.
다산의 심미안(審美眼)과 기록정신이 빛을 발한 대표적 케이스다.

파란만장의 삶을 불요불굴의 의지로 관통한 큰 바위 얼굴 같은 거인 다산!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서학(천주교) 연루 혐의로 셋째 형 약종과 조카 하상 부자가 처형되고, 가장 의지했던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 유배 16년 되던 해 현지에서 사망하고, 다산 자신도 18년간이나 머나먼 남도 땅 적소(謫所)에서 신고(辛苦)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부인 풍산홍씨와의 사이에 9남매를 뒀으나 6남매를 앞서 떠나보내는 참척(慘慽)의 슬픔을 겪었다. 또한 도움을 베푼 친구와 믿었던 동학(同學)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비운과 고통 속에서도 다산은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이를 대승적으로 뛰어넘었다. 인간적 고뇌(苦惱)를 학문적 성취로 승화(昇華)시킨 것.

아이러니하게도 다산의 불행이 민족사에는 ‘실학의 집대성’이라는 축복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실학자로서 다산의 위대성은 그 이전의 주류사상이었던 형이상학적 현실안주의 주자학(朱子學), 성리학(性理學)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에 바탕한 개혁(改革)을 기치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實學)을 꽃피웠다는 데 있지 않을까.

오직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고 구하고자 하는 민본(民本)의 애민(愛民)정신, 남다른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터이다.

호학(好學) 군주 정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승승장구하던 다산은 임금의 승하와 1801년(40세)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맞는다. 노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천주교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남인에 속한 다산은 천주교 신도로 지목받아 유배형에 처해진다.

다산은 경상도 포항 장기(長鬐)로, 둘째 형 약전(若銓)은 전라도 완도 동쪽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이 일어나자 다산은 서울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약전은 흑산도(黑山島)로, 다산은 강진(康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 18년은 다산에게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이 시기에 ‘다산학(茶山學)’의 두 축을 이루는 경세학(經世學)과 경학(經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500여권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탄생했다.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했으며, 제자들 또한 저술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산은 불세출(不世出)의 수많은 저서 만큼이나 훌륭한 인품으로 정평이 나있다. 나이와 신분을 초월해 교류했으며, 언제나 성심(誠心)을 다해 사람을 대했다.

한 사람이 닿지 못할 지식을 쌓았을 뿐 아니라 평생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다산은 각종 저술을 통해 현실 개혁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암행어사와 지방 수령을 하면서 백성의 삶과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탐관오리와 권문세가의 등쌀,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억울한 백성들을 대면했던 다산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이 있어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이를 일생의 지표로 삼는다.

조선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는 현실이고, 당시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자학은 이상이다. 이런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이어주는 학문이 바로 ‘실학(實學)’이다.

다산은 학문이 이상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현실에 활용 가능해야 하며, 이러한 믿음은 다산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사상이다.

그는 당시의 우리나라를 ‘털끝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사회로 진단하고 우리나라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런 고민의 궤적이 방대한 저술로 응축된 것으로 이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제도의 개혁이다.

그의 문학 또한 항상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상에 초점을 두었다. 1810년에 쓴 ‘보리죽’ ‘승냥이와 이리’ 등은 농촌의 참상을 사실대로 그렸다.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극심해지면서 삼정(三政)의 문란과 관리 아전들의 부패와 가렴주구를 비판하고 각종 적폐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그의 시는 음풍농월식의 글쓰기를 배척하고 시대의 아픔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사회성이 짙게 배어있다.

다산의 삶은 닥쳐온 불행이 그 자체로 인생의 비극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임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불행은 자신을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인생의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삶에서 내 격(格)의 깊이를 더하는 값진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산의 학문적 성취가 위대한 것은 그가 평생을 다해 이룩한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작업들이 한 인간으로 그처럼 견디기 힘든 혹독한 시절 귀양살이 중에 완성됐다는 점이다.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인생이 힘들다고, 공부가 어렵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산은 “정치가 백성들의 삶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오로지 핍박받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백성들을 생각했다. 자신을 버리고 오로지 백성만 생각하는 삶, 다산은 그것이 진정한 정치인,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과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200년 전 다산이 그토록 열망한 국가개혁론과 부국강병책이 아직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민망함과 답답함이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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