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 조은경 작가
지난 달, 평생을 지낸 서울을 떠나 이 곳 영천으로 완전히 이사를 했다. 5년 동안 두 집살이를 한 후에 드디어 서울을 정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영천에 주민등록도 해 두고 문화센터에 등록해서 이 곳 친구들도 더러 사귄 터라 심리적으로는 특별히 이사 오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동안 물건 사면서 불편하지 않게 두 개씩 샀기 때문에 이삿짐의 양이 많았다.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리하고 있는데 서울 친구 중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아이구, 평생 산 서울 생활 청산하고 어떻게 시골 내려가 사니?”
그 말 중에 ‘청산’이란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청산? 그게 뭐지?
사전을 찾아보니 ‘법인이 파산에 의해 활동을 정리한 후 주주 또는 조합원에게 분배하고 폐업하는 것’을 의미한단다. 영어로는 ‘clearing’이라 한다니 서울을 깨끗이 정리한다는 의미로 그 말을 쓴 것을 생각하면 틀린 얘기는 아니다.
 
옛날이면 그 말이 맞을까? 인터넷 세상이 된 지금 그 말은 맞기도 하지만 맞지 않기도 한다. 일단, 서울을 어떻게 완전히 정리한다는 말인가? 대한민국의 수도일 뿐 아니라 가족, 친척, 친구들 대부분이 서울에 있는데.

카톡으로 대화방을 만들어 친구, 친지들과 수시로 대화를 나눈다. 그들 대부분은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산다. 하지만 실지로 만나는 문제만 아니라면 그들과 나의 입장이 별 차이가 없다. 코로나 시대라 자주 대면하는 것도 아니니까. 드물게 대면하는 때에 내가 서울에 올라가서 만나면 된다. 그렇게 만나는 때가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될 것이고 나도 그 기회를 이용해 여행을 하는 것이다. 버스로 또는 기차로.
이제까지는 3시간 반 걸리는 고속버스 여행을 주로 했는데 4시간 걸리는 기차 여행으로 바꾸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기차는 화장실도 있고 놀며 졸며 가는데 버스보다 나을 것 같아서다.
 
시골 생활은 아무래도 자연과 접하는 시간이 많다. 사실 시골에서도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여기서도 욕심을 버리는 철칙이 중요하다. 가꾼 만큼 예쁜 꽃이 피겠지만 내가 무리하면 어느 순간 건강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50평 텃밭과 집 앞마당, 뒷마당에 동림원과 침수정 정자까지가 내가 신경을 쓰는 공간인데 작은 면적이 아니다.
 
하지만 아침마다, 해님을 맞이하는 순간은 정말 행복하다. 둥근 모습으로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기도하는 자세가 된다. 오늘 하루를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다. 날이 흐려서 해님을 보지 못하는 날은 또 그런 대로 괜찮다. 그런 날은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 뉴스를 듣거나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와인을 마시는 저녁도 흐린 날이어야 제대로 술 맛이 나는 것 같다.
 
시골 생활은 식물과 더불어 동물과도 함께 하는 일이다. 아침 해님이 떠오르기 전부터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에 잠이 깨곤 한다. 집에 어린이용 세밀화 새 도감 책이 있다. 그 그림들을 보면서 이름을 기억하곤 한다. 참새와 박새 딱새... 이놈들은 작은 놈들이다. 14센티 정도라고 새 도감이 알려준다. 여러 이름과 여러 모양의 새들이 보통 이런 사이즈다. 그보다 좀 더 큰 20센티 급 새들도 몇 종류 있다. 이들은 크기 때문에 눈에 잘 띈다. 오늘 아침에 정원에 찾아와 준 놈은 찌르레기가 틀림없었다. 제일 큰 부류의 놈들로 말하자면 45센티의 까치와 50센티의 까마귀가 있다. 여기엔 1미터 가량의 매와 독수리는 제외한다. 민가에서 가까이 볼 수 없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 까치 비슷한 놈이(크기와 모양은 엇비슷한데 까치와 다르게 연한 회색빛 꼬리이다.) 고택에 찾아들어서 둥지를 만들려고 했다. 이끼와 나뭇가지 등이 툇마루 앞에 떨어져 있곤 했다.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된다. 그러다가 고택 다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웬일이지? 퍼덕퍼덕하는 날갯짓인 것 같다. 가보니 다락에 새 두 놈이 갇혀서 나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다락에서 방으로 통해있는 문은 평소에 잠가 두니까 분명 바람구멍으로 들어온 것이 틀림없다.

고택은 나무집의 특성상 건물 윗부분에 바람구멍을 낸다고 했다. 높이가 한 뼘 가까이 되고 옆으로도 한 키 만큼 벌어져 있는 곳이어서 겨울이 지나면 먼지가 많이 쌓여 청소해 주어야 한다. 그 속에 그 큰 덩치의 까치만한 새 두 마리가 들어갔다니.... 들어갔으니 그 구멍으로 나올 수도 있어야 할 텐데 정말 새대가리인지 그건 힘 드는 모양이다. 양쪽으로 나갈 수 있게 방으로 통하는 다락문을 열어 놓고 나니 조용해졌다.

며칠 있다가 남편이 다락에 일이 있어 가보니 새 한 마리가 죽어 있다지 않는가? 한 마리는 어디로든 빠져 나갔는데 왜 다른 놈은 죽게 내버려 두었을까. 정말 새대가리라 그랬을까? 내가 다락으로 올라가 죽은 놈을 두 손에 받쳐 들고 내려왔다. 고운 깃털이 손에 만져지니 차갑지도 않고 죽은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새의 주검을 묻어 준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새들은 죽었어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45센티 길이의 새는 가벼운 주검이 아니다. 아직도 윤기 나는 검은 색 머리털과 푸른색이 도는 회색의 깃털이 아름답다. 고운 삶을 당연히 더 누려야 했을 생명체의 아픈 죽음에 조의를 표하고 단풍나무 아래 흙을 파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4월은 나무들에게도 삶과 죽음이 분명한 시기다. 지난 가을, 창문 곁에 향기로운 자태로 무럭무럭 자라기를 꿈꾸며 심었던 라일락도 새 봄에 다시 움을 트지 못하고 죽었다. 이태 전, 입구 계단께 심어 놓았던 반송 한 그루도 구제불능인 것 같다. 물론 더 생생해진 채 새 봄을 맞이한 나무들도 많지만.
 
서울을 떠나서 자연과 벗하며 좀 더 많은 생명체와 교류한다. 내 몸이 서울을 떠난다고 해서 그 곳을 청산할 것이라고 섭섭해 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하면 맞을라나 모르겠다.

‘우리의 인생에 ’청산‘이란 것이 어디 있겠니? 추억은 좀 더 깊이 쌓이면서 선명해지기도 하고, 반대로 또 희미해져 가기도 하고, 그런 도중에 서로 다른 것이 섞여서 모호해질 것인데..... 그렇게 파스텔 톤으로 우리의 과거를 그려가면서 사는 것이 인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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