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석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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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에 가족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본다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떠난 한국인 이민자의 고군분투(孤軍奮鬪) 정착기인 이 영화에서 이들 가족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는 미나리처럼 숱한 역경과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결국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낯선 미국 땅에서 서로에게 지지대(支持臺)가 되어준 것은 가족이었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사랑’의 가치였다. 가족이란 ‘사랑’으로 감싸고 어루만지고 격려하면서 서로 기대고 의지하는 관계이다. 이번 ‘미나리’ 영화의 오스카상 수상은 가족공동체의 가치가 세계의 보편 가치임을 일깨워 주었다. 가족이란 즐겁고 행복하면 그 자체로 만족하고, 어렵고 힘들면 함께 힘을 모아 고난을 극복한다. 실의에 빠진 사람,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가족의 사랑으로 구원하고 희망을 찾아준다.
1973년 8월 어느 날,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있는 맨섬(Isle of Man)의 유명한 휴양지 서머랜드에서 가족 단위로 휴가를 온 사람들, 지인이나 친구와 함께 휴가를 온 사람들 등 3,000여 명의 휴가객들이 야외 정원이나 수영장 등에서 저녁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오후 7시 40분쯤 호텔 내의 한 매점이 불길에 휩싸였고, 소방대가 도착한 8시 20분경에는 거대한 불길이 이미 호텔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화재가 발생하자 가족 단위의 휴가객들은 서로를 잃지 않고 함께 탈출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가족들은 혼란의 와중에서도 필사적으로 서로를 찾았고, 심지어 고립된 가족을 찾기 위해 출구의 반대편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화재 당시 대형 야외정원에 있었던 가족 중 절반이 자신의 가족을 찾아 헤맸고, 실제로 가족을 찾았으며 전원 무사히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지인이나 친구의 경우는 달랐다. 화재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족보다 더 중요한 관계라고 여겼던 친구들마저도 화재가 발생하자 19팀 중 탈출하기 전 서로를 찾아 헤맨 경우는 단 한 팀도 없었다.
51명이 사망하고 400여명이 부상한 비극적인 서머랜드 화재 사고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들은 비록 충격은 받았지만 자신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스스로 감격했다.
1846년 11월, 미국의 서부 개척민 80명이 캘리포니아 산맥을 넘다가 엄청난 눈보라를 만나 도너(Donner) 계곡에 갇혔다. 눈이 너무 많고 눈보라 때문에 전진할 수가 없어 결국 짐을 풀고 거기에 그대로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곤 그 겨울을 도너 계곡에 갇혀서 살아갔다. 구조대에 연락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젊은 독신 남자 15명을 빼곤 8세 여자아이부터 65세 할아버지까지 가족들이었다.
이듬해 봄 구조됐을 때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살아남은 독신 청년은 3명뿐이었다. 가족들은 노약자가 많은데도 60%가 생존했다. 서로 보살피고 의지한 덕분이었다. 도너 계곡 사건을 분석한 인류학자 도널드 그레이슨은 "가족은 생존의 보증수표"라고 했다.
가족은 생존의 보증수표.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돈이 없어도, 질병이 닥쳐도 가족이 함께 있다면 세상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얘기다.
이 대목에서 불현듯 빌 게이츠가 오버랩된다.
지난 4일, 결혼 27년 만에 ‘세기의 이혼’을 발표한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이자 세계 4위 부자(2021년 포브스 기준, 1305억 달러·한화 146조원) 빌 게이츠(66)와 멀린다 게이츠(57) 부부의 사례는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하는구나’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했다.
게이츠 부부의 이혼 발표 며칠 후 그들의 장녀 제니퍼 게이츠(25)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가족사진에 어머니 멀린다, 본인, 남동생 로리(22), 여동생 피비(19) 등 4명만 있고, 아버지 빌은 빠졌다. 또 멀린다와 세 자녀가 이혼 발표 후 서인도제도 그레나다 섬으로 떠난 것을 두고 지인들은 “모든 가족이 빌에 화가 나 있어 이 여행에 초대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심리학자는 가족 안에는 태초부터 내려오는 신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위기상황에서 가족이 발휘하는 힘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혼자일 때보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거뜬히 해낼 수 있으며, 좌절과 공포 상황에서도 그것을 견딜 수 있게 해주며, 구성원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고 한다. ‘기쁨을 같이 하면 그 기쁨이 두 배가 되고, 슬픔을 함께하면 그 슬픔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가장 잘 통하는 공동체가 가족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가족 관련 끔찍한 사건들을 보면 신뢰의 공동체, 안전지대로서 가정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지난해 16개월 된 입양아 정인이를 폭행해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양모에게 14일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정인이의 사망 원인이 된 장간막·췌장 파열이 피고인이 의도적으로 강한 충격을 가한 결과라며 살인죄를 인정했다. 학대를 방조한 양부도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지난해 동거남의 아들을 여행용 가방에 가둬 숨지게 한 여성도 최근 대법원에서 징역 25년 형이 확정됐다.
경기도 화성에서 두살 배기 입양아를 폭행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뜨린 양부가 11일 구속됐고, 12일에는 경남 사천에서 부부싸움 도중 생후 7개월 된 아이를 때려 의식을 잃게 한 친모가 긴급체포됐다.
부부 등 가족 간 가정폭력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경기 평택경찰서는 함께 술을 마시고 귀가한 남편 A씨(61)가 욕설 등 술주정을 부리자 벽돌로 머리를 내리쳐 숨지게 한 혐의로 아내 B씨(62)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16일 밝혔다.
또 올해 4월 법원은 지난해 귀가하던 아내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려 한 70대 남성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최근 5년간(2015~2019년) 가정폭력으로 심리·정서적 지원, 의료지원, 시설입소 연계 등을 지원받은 피해자 수는 2015년 17만8369명에서 2019년 23만4688명으로 약 32%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으며, 아동학대의 경우는 2015년 1만1715건에서 2019년 3만45건으로 약 156% 늘었다.
가정폭력은 심리·정서·경제·사회·환경적·음주·부부 관계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 확산은 가정폭력의 발생 원인이 된다는 자료들도 제시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이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팬데믹) 기간에 늘고 있다”고 밝혔으며, 유엔인구기금(UNFPA) 역시 “코로나19 기간 동안 세계적으로 가정폭력이 20%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제 코로나19 이후 2020년 가정폭력 상담 건수가 늘어났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지난해 가정폭력 상담 건수는 예년보다 40% 증가했는데, 배우자가 58.3%로 가장 많았으며 △부모 19.4% △형제·자매 6.1% 순이었다.
서울 강동구립 가정상담센터 관계자는 “코로나19로 가족이 집에서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정폭력이 늘어났고, 상담 사례도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일부 부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로 가족과 가정에 대한 중요성과 가치가 더욱 소중해지고 부각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사회 발전과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가족이나 가정의 형태도 다양화되고, 이에 따른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 강화된다 하더라도 가족 관련 문제는 국가의 복지 정책이 대신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어떤 재난과 곤경도 함께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득한 ‘가족의 힘’을 회복할 수 있는 시민 교육과 사회적 각성이 다시 한번 필요한 시점이다.
근래 가족공동체에 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가족공동체 변화에는 핵가족화 현상, 1인 가족, 자녀를 갖지 않는 맞벌이부부인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 증가에 더하여 이혼 증가, 한 부모 가정, 미혼모(부), 조손(祖孫) 가정 등 가족의 파편화(破片化) 현상까지 가세하고 있다.
가족공동체의 변화 양상은 전통적인 혈연(血緣)중심을 넘어선다. 입양이나 재혼가정의 증가를 비롯해 비혈연 관계임에도 종교나 경제사정 등 다양한 이유로 가족처럼 함께 공동 생활하는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가히 ‘가족의 재탄생(再誕生)’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의 파편화 현상은 사회에 적지 않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서로 의지하고 돌보고 일이 발생하면 서로 감싸고 녹여냄으로써 가정에서 치유되던 일들이 이제는 조그만 갈등까지도 외부에 노출된다. 때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
가족파괴현상은 가족 파편화에서 비롯된 부작용의 한 단면이다.
‘가정의 달’ 5월에 우리가 맞이한 중요한 과제는 가족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때마침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 코로나 팬데믹이 가족의 가치를 새롭게 생각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믿을 곳은 가족뿐이고 가족의 사랑이 더욱 그리워진다. 그 사례가 역설적이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 방역대책이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가족관계가 강화되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 등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간과했던 가족의 가치와 가족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여기에 정보화와 디지털 사회의 전개는 사람냄새 나는 대면(對面)사회를 ‘비대면 사회’로 바꾸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 팬데믹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면서 가족 간에 단절됐던 대화가 오가고 놀이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 이렇듯 코로나 팬데믹이 일상의 풍경을 바꾸어 놓으면서 가족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가족 공동체’는 혈연으로 이루어진 긴밀한 공동체이자 모든 공동체의 기본이다. 공동체의 유지·발전은 서로 배려하는 마음과 상호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행동에서 이루어진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할 때 가능하다. 모든 공동체는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한다.
다만 가족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와 다른 점은 ‘사랑’의 밀도(密度)가 더 깊다는 것이다. 가족공동체의 핵심가치와 윤리는 사랑과 효(孝)이다. 부부의 사랑, 자식의 부모공경, 형제간의 우애가 그렇다. 여기에 믿음이 추가된다. 사랑은 믿음을 전제로 한다. 믿음이 있어야 사랑이 꽃을 피운다. 부부의 사랑과 신뢰,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자식의 부모에 대한 공경이 모두 믿음에 기초한다.
한편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 즉, 양육문제가 가정의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나이 든 부모는 자식들과 떨어져 살다보니 외로움을 느끼고, 부모가 된 자식들은 자녀의 양육 문제에 부딪히면서 서로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변화 역시 가족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요인이 되고 있다.
가족공동체의 복원·재창조는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가족 구성원을 묶어주는 핵심가치가 있어야 가능하다. 바로 ‘사랑’이다. 함께 사는 식구보다 떨어져 사는 식구가 더 많은 현실에서 오늘날의 가족은 같이 사는 식구(食口)만 가족이 아니다.
정보화와 디지털 시대의 축복으로 떨어져 살아도 함께 사는 것처럼 소통을 할 수 있는 수단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다양한 통신수단의 발전으로 떨어져 있더라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부모에 대한 공경, 부부간의 사랑, 형제자매간에 우애를 표현하고 다질 수 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명심보감(明心寶鑑) 치가(治家)편 ‘자식이 효도하면 어버이가 즐겁고(子孝雙親樂·자효쌍친락), 집안이 화목하면 만사가 이루어진다’에서 유래한 이 다섯 글자. 주변에서 가족과의 진한 유대 없이 성공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점을 볼 때, ‘가화만사성’이란 글귀만큼 평범한 것 같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핵심적인 경구(警句)가 또 있을까 싶다. 더욱이 오늘날 코로나19 같은 비상상황임에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