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석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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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번영 가능케한 영웅들의 爲國獻身 잊지말아야
그랜드 캐니언과 요세미티국립공원, 애리조나 세도나의 벨록(Bell Rock) 등 풍광 좋은 유명 관광지와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 LA 뉴욕 워싱턴 등 미국의 주요 도시를 두루 찾아보았다.
그 중에서도 지금껏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을 꼽으라면 단연 수도 워싱턴DC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이다.
1995년 7월, 한국전쟁 45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이 한국전쟁기념공원에서 접한 가슴 뭉클한 감동이 너무나 선명하게 각인된 때문이다.
기념공원은 성조기, 벽화, 조상(彫像), 비명석판(碑銘石板), 회고(回顧)의 연못, 유엔산책로 등으로 구성돼 있다.
비문(碑文)에는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나라(대한민국)와 국민(대한민국 국민)을 지키기 위해 부름에 응한 아들과 딸들에게 조국은 경의를 표한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1950~1953)”라는 글귀가 쓰여있다.
링컨기념관(Lincoln Memorial)에서 바로 지척(咫尺)에 있는 이 기념공원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병사 19명이 판초(우의)를 입고 M1 소총을 손에 들거나 무전기를 등에 멘채 전투대형으로 행군(行軍)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어 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미군 병사들이 판초를 입고 있는 것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비가 오는 가운데서도 용감하게 돌진하는 모습을 형상화했고, 미군병사 19명의 모습은 바로 옆에 있는 대리석 반사벽에 비친 19명을 포함해 한국의 38선을 상징한다고 하던 관계자의 설명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특히 대리석에 새겨진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경구(驚句)는 무엇보다 깊은 울림을 주었다.
공원 내에 설치된 회고의 연못 가장자리 대리석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인명피해 규모가 기록돼 있다. 전사 54,246명, 실종 8,177명, 포로 7,140명, 부상 103,284명.
한국전쟁에 이토록 많은 미군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함께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그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얻어진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 번영에 가슴이 뭉클했다.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시절인 2013년 이맘때 동료 위원들과 함께 평택 제2함대에 마련된 천안함 전시장을 견학하고 난 감회(感懷)가 여전히 먹먹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차디찬 서해 바다에서 북한의 만행(蠻行)에 의해 격침, 꽃다운 ’46용사(勇士)‘가 목숨을 잃은 그 비극의 선체(船體)!
무서울 정도로 선체 중앙 부분이 폭파되고 산산조각나 있던 처참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2분, 해군 2함대 소속 초계함(哨戒艦)인 천안함(1200톤급, 길이 88.3m, 폭 10m, 최고속력 32노트)은 서해 북방한계선 근해 백령도 남서방 2,5km 해상에서 정상적인 해상경비와 어로활동 지원업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 이 때 느닷없는 북한 어뢰(魚雷)의 공격을 받고 선체가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 승조원 104명 중 58명은 구조됐으나 46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다국적연합정보분석팀은 ’천안함은 북한의 소형 잠수정으로부터 발사된 어뢰에 의한 외부 수중폭발의 결과로 침몰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천안함 침몰 원인을 두고 일부 언론과 연구자들의 반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전몰장병과 생존자, 유족들에 대한 모욕과 폄훼가 계속돼왔다.
최근 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상근 부대변인이 한 방송에서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에 대해 “생때같은 자기 부하들을 수장시켜 놓고 그 이후에 제대로 된 책임이 없었다”고 말해 거센 논란을 일으켰다.
급기야 생존 장병 16명이 현충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입장을 밝혀달라"며 시위를 벌인 사실까지 알려지며 불길은 청와대까지 번졌다.
또 서울 휘문고 교사 A씨는 지난 12일 자신의 SNS에 "천안함이 폭침이라 치면, 파직에 귀양 갔어야 할 함장이 어디서 주둥이를 나대느냐"며 "천안함은 세월호가 아니라 군인이다. 천안함이 무슨 벼슬이냐"라고 거친 욕설과 함께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이에 최 전 함장은 14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를 찾아 A씨를 명예훼손과 모욕죄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4월 2일 전체회의를 열고 ‘천안함 피격 사건의 원인을 다시 조사해 달라’는 진정에 대해 우여곡절 끝에 만장일치로 각하 결정을 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2월 결정된 위원회의 폭침 사건 재조사는 철회됐다.
위원회는 이날 전체회의에서 “진정인인 신상철 씨 적격 여부에 대한 위원회 회의결과, 진정인이 천안함 사고를 목격하였거나 목격한 사람에게 그 사실을 직접 전해 들은 자에 해당한다고 볼 만한 사정이 보이지 아니한다”며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17조 제1항 제1호에 따라 이 사건을 각하한다고 결정했다”고 밝혔다.
‘천안함 좌초설’을 제기했던 신 씨는 지난해 사건 재조사를 요청할 당시부터 진정인 요건에 충족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위원회 사전 법률검토 결과 신 씨가 유가족·목격자에 해당이 안 돼 신청인 적격자 요건에 충족되지 않아 애초 ‘각하 의견’이 모였으나 심사위원회 상정 직전에 ‘조사 개시 의견’으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나왔었다. 더구나 국제 공동조사단 조사결과와 국방부 공식입장은 천안함 폭침 원인이 북한의 어뢰 공격 때문이었다는 것으로 대통령 소속 정부기관에서 사건 재조사 개시를 결정한 것은 ‘천안함 배후가 아니다’라며 사과 요구를 무시해온 북한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었다.
위원회 결정전 천안함 46용사 유족회(회장 이성우)와 천안함생존자 예비역전우회(회장 전준영), 천안함재단(이사장 손정목) 등 천안함 관련 3단체는 공동성명에서 “천안함 폭침에 대해 대통령과 정부가 입장을 밝히고 북한의 사과나 유감 표명을 받아내 46용사의 명예를 회복시켜달라”고 주장했다.
‘예산 타령’으로 6·25 참전용사들의 약값 지원을 효과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있는 정부의 자세도 이해하기 힘들다.
6·25 참전유공자인 노병(老兵)들의 경우, 매월 34만원의 ‘참전 명예수당’이 나오지만, 각종 질병으로 수당 대부분을 약값으로 쓰고 있는 현실이다.
이들이 국가로부터 약값을 지원받으려면 전국 거대도시에 6곳뿐인 보훈병원으로 가야 한다. 이곳에선 참전유공자 진료비의 90%, 약제비(藥劑費)는 최대 전액을 지원해준다.
대부분 80~90대로 거동이 불편한 참전유공자들이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긴 거리를 이동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대신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전국 421곳의 민간 위탁병원을 이용한다. 동네 곳곳에 위치해 찾기 편하지만, 이곳은 진료비만 90% 지원해줄 뿐 약값은 예외다. 결국 거동이 불편한 경우 사비(私費)로 전액을 내야 한다. 참전유공자법 시행령에 ‘위탁병원의 경우 약제비용은 제외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국민권익위원회가 2019년 국가보훈처에 제도를 개선하라고 했지만,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다. 예산편성권을 쥔 기재부가 ‘예산 부족’을 이유로 퇴짜를 놓은 것.
한 전문가는 “위탁병원까지 약제비를 지원한다 해도, 연간 소요 예산은 70억~110억원 수준으로 추정된다”며 “복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지만, 보훈은 ‘전쟁부터 사후(死後)까지’란 생각으로 구조적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보훈의 진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경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국은 당신들이 돌아올 때까지 결코 잊지 않겠다.”
미국 하와이에 위치한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의 표어다.
미국이 전사자 유해수습과 송환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DPAA의 예산은 2020 회계연도 기준으로 1억 463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800억원에 이른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을 비롯해 제1·2차 세계대전 당시 실종자와 미수습 전사자까지 찾고 있다.
그러나 2021년 6월,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을 생각하면, 과연 우리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답답한 심정이다.
전몰 장병들의 피로써 지켜냈던 이 나라, 그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욕되게 하지는 않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과연 번영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우리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있을지 두렵기조차 하다.
지난 4월 대통령 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이 난 천안함 폭침 원인을 재조사하겠다고 했다가 각하하는 사태가 이를 웅변한다.
오죽했으면, 당시 전준영(33) 천안함생존자예비역전우회장이 본인 SNS에 “군인 여러분 국가를 위해 희생하지 마십시오, 저희처럼 버림받습니다”라고 절규의 메시지를 올렸겠는가.
이보다 앞서 보훈처는 지난 2019년 9월, 보훈심사위원회를 열어 4년 전 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의 목함지뢰로 두 다리를 잃었던 하재헌 예비역 중사에게 ‘전상(戰傷)’ 아닌 ‘공상(公傷)’ 판정을 내려,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천안함 폭침(爆沈)이 ‘북한 책임’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천안함 장병 사망 원인 재조사 운운하면서 희생한 장병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정부.
지난해 현충일 추념식에 코로나19 순직공무원 유족은 포함했지만, 당연히 참석해야 할 천안함 폭침 및 연평해전·포격 관련 생존자와 유족은 빼놓고 진행하려다 논란을 빚기도 했다.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애국 군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이들을 영웅으로 대우하는 국가와 사회의 성숙한 정신과 풍토가 저변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깊이 깨달았으면 한다.
국가를 위한 희생과 공헌을 기리는 문화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비슷하다. 국가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아테네 최후의 전성기를 이끈 지도자 페리클레스(BC 495~BC 429)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사자 추도연설에서 “아테네는 가장 경관이 빼어난 곳을 국립묘지로 선정해 전몰자들을 안장하고 그들의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비를 국고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몽골 대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칸도 칙명(勅命)을 통해 “전사한 장졸(將卒)들의 자녀들을 궁(宮)으로 데려와 짐(朕)의 자녀와 똑같이 양육하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견주어 참전용사에 대한 존경, 군인에 대한 예우가 부족한 게 우리의 현주소다.
국방부가 ‘늑장 대응’으로 천안함 전몰장병 유족연금을 오래도록 지급하지 않았다는 최근 보도를 접하고 무척 우울했다.
천안함 생존자들이 아직도 한(恨)과 같은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사실을 접하고 슬프기 짝이 없다.
호국 보훈의 달 6월, 역사를 함께 애도(哀悼)하고 같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자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한민국은 위국헌신(爲國獻身)한 호국영웅들을 끝까지 예우하며, 그것이 나라를 강하게 만든다는 이치(理致)를 국민 모두가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천하가 비록 편안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天下雖安 忘戰必危·천하수안 망전필위)”
‘사마병법’의 저자인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장군 사마양저(司馬穰苴)의 말이다.
“우리들은 행복해진 순간마다 잊는다. 누군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렸다는 것을.”
프랭클린 D. 루스벨트(미 32대 대통령)의 경구(警句)가 더욱 절절하게 다가오는 ‘호국보훈(護國報勳)의 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