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혁 萬事亨通
▲ 김태혁 萬事亨通
 
70-80년대 대학가나 공장 또는 시위현장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애창곡 1위는 ‘아침이슬’이었다.
 
당시 김민기 작사, 작곡의 ‘공장의 불빛’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등도 많이 불렸지만 ‘아침이슬’ 만큼은 아니었다.
 
‘아침이슬’ 역시 김민기 작사 작곡의 곡이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으로 시작하는 ‘아침이슬’은 가사만 보면 건전가요 냄새가 많이 난다.
 
김민기 역시 ‘아침이슬’을 운동권 가요로 만든 것이 아니다.
 
김민기는 당시 서울대 미대생이었다.
 
지인들과 긴 밤을 지새워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끊기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이 돈암동 야산의 공동묘지였다.
 
김민기는 술이 깨고 다시 거친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자신의 심정을 작사했고 이 곡이 바로 ‘아침이슬’ 이다.
 
그래서인지 서슬이 퍼렇던 박정희 군부시대에 ‘아침이슬’이 건전가요로 선정되는 블랙코미디도 있었다.
 
이후 시위 현장에서 전국적으로 ‘아침이슬’이 불리면서 지난 1975년 다른 여러곡들과 함께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억압된 정치 상황을 은유하는 듯한 가사로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후 10월 유신이 끝나고 제5공화국 시절까지 금지곡으로 남아 있었지만, 민주화를 염원하는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노래로 널리 불려 왔다.
 
‘아침이슬’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김민기 헌정 사업이 추진된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김민기는 사람들이 자신을 ‘아침이슬’의 김민기로 기억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세상은 여전히 과거의 한순간만을 기억하면서 화석화된 김민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김민기는 지난 1987년 이한열 열사 노제를 보러 갔다 당시 백만 군중이 다 함께 ‘아침이슬’을 부르는 것을 듣고는 '아 이 노래는 더이상 나만의 노래가 아니구나'하고 느끼면서 이후 공식석상에서 '아침 이슬'을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아침이슬’은 김민기의 말대로 이미 그의 품을 떠나 민중가요 혹은 대중가요가 된 것이다.
 
그 노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은 이젠 듣는 사람의 몫이 된 것이다.
 
‘아침이슬’은 더 이상 김민기 노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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