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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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모더나 백신 2차 접종을 끝낸 딸과 외손녀 둘이 7월 1일에 막 시행한 자가 격리 면제의 혜택을 받고서 한국에 온 것이다. 사위는 직장 때문에 오지 못 했다.
도착한 시간은 한밤중, 대기에 꽉 찬 수증기가 목 끝까지 차올라 더욱 짙은 어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국에 3주 머무를 예정이니 2주 자가 격리 면제가 그들에겐 황금과도 같은 기회이다. 그러니 비가 쏟아지면 어떠랴? 한밤중이라면 어떠랴. 한국에 온 것만도 감사 감사한 일이었다.
다음날도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식사를 준비하는데 작은 손녀가 비를 맞으며 정원 안에 있는 6각정 쪽으로 급히 가는 것이 보인다.
‘저런! 내가 우산을 안 주었나?’
걱정되어서 우산을 두 개 가지고 그 곳으로 갔다. 소녀는 내게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었는데 기본 명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고1 소녀가 명상이라? 그것도 미국에서 학업 중인 소녀가? 신기했다. 우산 여기 있으니 비 맞지 말라고 일러 준 뒤 본채로 돌아갔다.
딸과 큰 손녀가 오더니 그 아이가 저러는 것은 삐져서 그렇다는 것이다. 저들끼리의 말다툼 끝에 숙소인 게스트하우스를 나와 맘에 맞는 장소에서 명상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저 곳에 갔다는 것이다. 딸은 그 아이가 중2병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명상? 어떻게 알게 되었고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역시 유 튜브 영상 덕분이었다. 이렇게 세계는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있었다. 우연히 보게 되었고, 그것이 자기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친근감이 들었고, 그래서 마음 수양에 명상을 써 보겠노라고 생각한 마음이 대견했다. 비록 삐졌을 때나 쓸지라도 말이다.
명상이 도움이 되었는지 딸네 식구들은 금방 하하 호호 하면서 즐겁게 한국에 도착한 첫 아침 식사를 마쳤다.
사흘 동안 줄창 비가 오더니 주말이 되었고 서울에서 막내아들이 고명딸을 데리고 내려왔다. 신기하게도 일요일 아침엔 해가 방긋 나왔다.
아이들은 그 동안 기다렸던 스케줄을 소화하겠노라고 조른다. 무엇인지 물어봤더니 경주에 가는 것이란다. 경주? 이 애들은 경주가 어딘지 안단 말인가?
경주가 어디인지 물어보니 미국서 온 애들은 역시 모르고 친손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신라 장수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 땅-
아니? 그 아이는 아직 유치원생이다. 독도 노래는 지난번 우리 부부가 서울에 올라갔을 때 손녀가 전문을 다 외워 부르는 것을 깜놀하면서 들었다. 손녀는 그(!) 신라의 수도가 경주라는 것이다. 아마 이곳으로 내려오는 KTX 안에서 아들이 말해 주었겠지.
미국서 온 손녀들은 경주에 가면 ‘황리단 길’이라는 젊은이의 거리가 있고 그곳에서 한복을 곱게 빌려 입고 한옥 앞에서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서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지들이 ‘신라’를 알 리 있나. 좀 실망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들한테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우리 부부가 아이들을 키울 때 생각을 해 보았다. 여행을 하게 되면 남편은 역사적인 장소 앞에서 하나라도 더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려고 애썼지만 아이들은 게임을 하거나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거나 하면서 고상한 이야기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인 것이다.
하여간 맑은 날씨를 놓치지 않으려고 우리 집 자랑인 18년 된 트라제 차에 모두 올라타고 경주로 갔다. 황리단 길엔 정말 사람들의 왕래가 많다. 모두 마스크를 하고 다닌다. 예쁜 가게들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잠깐 내려 보니 날씨가 정말 기절하도록 더웠다.
어떻게 걸어 다닐 수가 있단 말야? 훅훅 찌는데다 태양열이 피부에 매섭게 내리꽂히니 금방 머리가 띵해졌다. 이런 날씨에 한복을 입고 걸어 다닌다니?
다행히 딸이 묘안을 내었다. 한복을 갈아입는 즉시 냉방을 한 차에 타고 불국사로 가서 사진을 찍기로...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되었다. 세 여자아이와 딸까지, 네 여자가 한복을 입고 불국사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다. 불국사라면 한국 건축의 정수가 아닌가? 소나무 그늘이 많은 불국사에서 사진을 찍기로 한 것은 정말로 좋은 생각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작은 손녀가 또 육각정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는 과정에서 자매들끼리 다툼이 발생했다. 소녀는 삐졌고 마음을 달래려고 육각정에 앉아 수련에 들어갔다.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렸는데 자신의 모습이 밉게 나왔다고 생각한 쪽이 삐졌던 것이다.
옛날 내가 청소년일 때는 서울 한 복판인데도 초등학교 가는 길에 자그만 언덕도 있었고 그곳에서 풀꽃을 따면서 놀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란 노래를 실감나게 부르곤 했던 것이다. 서울도 그런데 당시 시골 살던 어린이들에게는 그런 추억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렇게 우리 세대는 자연스레 푸른 나무나 풀과 꽃과 가까웠는데 이 애들은 시골까지 와서도 풀과 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엔 할미가 묘안을 내었다. 명상도 좋지만 마음 수련의 하나로 텃밭 일 하나는 어떨까? 다행히 우리 텃밭엔 수확을 기다리는 ‘하지 감자’가 있다. 이런 저런 일로 바빠서 아직 캐질 못했다. 물론 도시적인 두 아가씨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감자 캐기’는 추억에 남을 일임에 틀림없다. 2021년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19가 창궐하고 있던 중에 대한민국에서 감자를 캐면서 여름을 보냈다면 정말 보람 있는 일일 것임에 틀림없고 그런 사진을 올린다면 두 아이들의 미국 친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