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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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또 자매간에 언쟁이 난 모양이다. 딸이 고등학교 1학년인 작은 손녀가 언니에게 한 욕을 그대로 내게 전해 주었다. 물론 내가 꼬치꼬치 물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앗! 그야말로 심한 욕설이었다. 3류 미국 범죄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욕을 내 손녀가 하다니..... 그것도 제 언니에게. 어떻게 그 버릇을 고칠 수 있을까? 남편이랑 나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게다가 둘이 언쟁을 할 때 들었는데 동생 쪽 목소리가 더 크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한다지? 이러지 말아라, 저러지 말아라. 쉽게 말하면 도리어 역효과가 일어날 수도 있다. 접근이 어려웠다.
대구에 나가서 쇼핑할 때 손녀들은 가격표를 보고 비싼 것은 스스로 택하지 않으려 했다. 대견했다. 딸을 키울 때 비싼 것을 사 주지 못했고 그 이유로 여러 가지 핑계를 대었지만 결국 집안에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딸이 월급쟁이한테 시집을 갔으니 몸에 밴 절약 정신을 발휘해서 알뜰히 사는 것이 당연했고, 제 딸들한테도 그렇게 가르친 것이 나름 좋아 보이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래서 작은 손녀에게 말했다. 앞으로 언니에게 욕을 한 마디도 안 한다면 네가 원하는 이것을 사 주겠다고. 이 방법이야말로 고전적인 훈육 방법이지만 좀 낯간지럽기도 했다. 물건을 가지고 이용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아이는 너무나 기뻐하면서 그러겠노라고 했다. 정말 이렇게 쉽게 고쳐질까?
동성로 뒷골목을 지나치면서 작은 아이는 돈을 천원 내면 복싱 글로브를 치는 게임 앞에서 멈췄다. 남편이 금방 눈치 채고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주었다.
최고 파워가 9990 이었는데 손녀 아이의 파워는 9640이었다. 남자 고등학생들도 많았을 텐데 그 아이의 파워가 남자 애들 못지않다는 말이다.
남편은 내게 손녀의 그 넘치는 에너지를 킥 복싱 같은 운동으로 순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금 그 아이는 미국에서 테니스와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는데 그것은 그 아이한테 맞지 않거나 부족한 것 같다는 것이다. 저녁에 우리 가족은 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음료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손녀들은 그날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낌없이 베푼 선물 앞에서 기분이 좋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남편은 작은 손녀에게 킥복싱을 권했고 그 아이는 해 보겠노라고 했다. 내가 다시 언니에게 욕을 안 하기로 약속하자고 했고 그 애는 흔연히 손가락을 내밀며 약속했다.
이렇게 쉽게 우리 부부가 손녀의 훈육에 성공한 것일까? 그날 밤 딸은 내게 어쩌면 손녀들에게 외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이 꼭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살며시 말했다. 미국에 사는 그 애들의 친할머니는 도합 15명의 손자손녀가 있는 다복한 할머니이고 상대적으로 우리 아이들에게는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그럴까?
그것이 원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우리 부부가 사춘기에 있는 손녀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다음날은 전날 늦게 잤는데도 불구하고 6시가 되기 전에 일어났다. 시간을 확인하고 나자 오랜만에 텃밭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추씨와 당근 씨를 뿌려 놓은 부분을 점검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온통 잡초 밭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작물이 움이 텄는지 알 수가 없었다. 키가 커진 잡초들의 윗부분을 대충 손바닥으로 훑어 주고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많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싹이 터 있었고 그 놈들은 키 큰 잡초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꼼꼼히 살펴보면서 주변의 잡초들을 제거해 주었다. 물도 주었다. 이번엔 호박 쪽을 살펴보았다. 남편은 호박잎쌈을 좋아해서 호박이 조금 자라기 시작하면 잎 따기를 채근한다. 이번엔 손녀 아이들 때문에 그 시간을 갖지 못했다. 외식이 많았던 탓이다.
호박들은 누가 돌보지 않았어도 엄청나게 큰 잎을 단 채로 덩굴져 움직이고 있었다. 호박 구덩이를 팔 때 퇴비를 충분히 준 덕분인 것 같았지만 얼굴 면적 두 배는 되는 거대한 호박잎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덩굴 하나가 때마침 꽃을 피우고 있는 8년생 무궁화나무 위로 올라가 있지 않는가?
이게 웬 일이니? 거긴 길이 아냐. 호박이면 호박답게 땅 위로 기어야지, 무궁화나무 위로 올라가다니? 무궁화나무 줄기를 감은 덩굴손을 풀어내고 끌어내어 땅 위로 옮겨주었다. 그래, 거기서 편안하게 호박을 키우렴.
이런 게 아이를 키우는 데도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무궁화나무 위로, 또는 다른 꽃나무 줄기를 감고, 발을 뻗어나가는 호박 덩굴을 제자리로 옮겨 주는 것은 제 때, 제 자리에 한 번만 옮겨주면 된다. 시기라고 한다면 덩굴이 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부터 언제라도 좋다. 아무래도 무궁화나무에게 해를 끼칠 정도가 되기 전이 좋겠지.
조그만 텃밭을 가지고 이런 저런 식물을 심어 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 법한 일들이다. 작은 텃밭에서 여러 작물들은 서로 경쟁하며 자란다. 그러면서 다른 나무나 식물이 햇빛을 보지 못하게 막기도 하고 심하게는 뿌리의 영양을 다 빼앗아 가기도 한다. 농부는 많은 것을 보면서 식물의 마음을 느끼고 아픔도 느끼면서 돌봐준다. 길을 잘못 든 식물의 덩굴손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런 것이 농부의 마음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