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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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름은 갔노라고, 그렇게도 뜨거웠던 태양빛은 이제 그 열기를 잃게 된다고 귀청을 울려대는 매미 소리가, 하늘을 나는 고추잠자리가 말하고 있다.
물론 아직 8월이다. 하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새벽 잠자리에서 이불을 끌어당기면서 벌써 가을인가? 되뇐다.
가을을 느꼈을 땐 먼저 텃밭을 정리해야 한다. 농부가 수확할 시기를 잃어서도 안 되고 파종할 시기를 놓쳐서도 안 된다는 것을 농촌에 내려온 몇 년 사이 이미 배웠다.
집 안에 주부가 며칠 게으름 부리면 티가 나는 것처럼 텃밭도 정원도 금방 티가 난다. 호박 줄기가 지금이 어느 땐지 잊어버린 채 신나게 커간다. 꽃도 많이 달렸다.
생각보다 호박은 실하지 않다. 나는 새 순을 잘라준다. 잎과 줄기도 잘라준다. 지금은 이미 달린 파란 호박을 잘 익히는 때라오. 지금 이렇게 줄기를 키우는 때가 아니라오.
토마토도 마찬가지다. 파란 토마토가 여기저기 달렸는데 새 순이 부지기수다. 이럴 때도 적당히 잘라줘야 한다. 작년엔 이런 것을 몰라서 첫서리가 내렸을 때 익지 않은 채 달려있던 토마토를 다 버려야 했다.
이런 식물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사람도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나이는 70이 넘었는데, 할 수 있다고 고집하면서 자꾸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경우다. 벌려놓은 일들 마무리가 더 중하지 않을까?
가을 작물을 심기 위해 밭 만들기도 해야 한다. 삽으로 또는 호미로 땅을 파고 뿌리와 잡초를 걸러내고, 봄에 쓰고 남겨 놓은 퇴비를 뿌려 놓는다. 배추는 모종으로, 무는 씨로 파종할 준비를 마친다. 상추씨 뿌릴 준비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로메인 상추를 심을 생각이다. 줄리어스 시저가 좋아했다고 해서 시저 샐러드, 또는 로마인들이 좋아했다고 해서 로메인 상추로 불리는데 아침마다 여러 가지 채소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을 때 가장 사랑스러운 중심 채소가 된다.
8월이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아침은 더욱 귀한 시간이 된다. 저녁도 서늘해 좋지만 벌레가 많은 게 흠이다. 대신 아침엔 벌레가 없는 편이라 일하기나 산책하기에 좋다. 도시에서의 산책이 눈과 마음으로만 하는 산책이라면 시골에서의 산책은 손을 쓰는 산책이랄까? 주머니가 달린 앞치마를 걸치고 전정가위와 고무장갑을 그 주머니에 넣은 채로 장화를 신고 일하러 가는 모양새로 나선다. 걸리는 줄기를 전정가위로 가볍게 처리해 주고 동림원 과일나무를 보살피다가 익은 사과나 복숭아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오기도 한다.
어제 외출에서 돌아오니 집 대문 앞에 몇 가지 과일 보따리가 놓여 있다. 포도와 복숭아, 자두 세 종류인데 머리를 갸우뚱 해봐도 어느 누가 놓고 간지 알 수 없다. 몇 집에 물어 보았는데 아니라고들 한다. 자꾸 물어보기도 난처하다. 며칠 전에는 내가 동림원에서 수확한 참외를 여섯 집에 나누어 드렸다. 그 중 세 집은 주인장이 출타 중이어서 대문 앞에 놓고 왔다. 그 중의 한 분이 내게 보내 주신 건가? 하지만 내가 들른 집은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었고 과일 농사도 하지 않는 분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골의 미스터리.... 근사하지 않는가? 언젠가는 누가 했는지 알게 될 것이고 어쩜 영원히 모를 수도 있지만 어느 편이라도 좋지 않은가? 서로 생각하고 상대에게 주고 싶어 한다는 것, 고마운 마음, 다정한 마음을 알고 느낀다는 것, 그것이 좋다. 마을을 걸으면서도 이 마을의 어느 누구가 내 집 앞에 무언가를 놔두고 갈 생각을 했다는 것, 그이가 그런 마음의 결정을 한 순간에 감사하면서 미소를 띤다.
아마 우리 모두는 이런 미스터리의 주인공이 되는 행운을 마음속에서 원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 살 멋과 맛을 이끌어내 주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이런 자그마한 축복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엔 동림원 후원회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복숭아 한 상자씩을 보내드렸다. 배송에 문제가 없도록 딱딱이 복숭아 중 최상품을 골라 보내드렸다.
물론 동림원에서 생산한 과일은 아니다. 동림원 나무들은 아직 어리다. 영천에서 제일 농사를 잘 짓는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그런 분의 과일을 자부심을 갖고 보내드리는 것이다. 모두 좋아한다. 혹 말랑한 황도 복숭아를 좋아하는 분들은 조금 불만일 수도 있지 않나 싶지만 향내 가득한 신선한 수밀도는 배송에 문제가 있어서 포기했다.
8월의 마지막 주일은 여름을 정리하고 가을을 맞이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가을을 예고하는 서늘한 바람이 스치면 왠지 경건한 마음이 되어 옷깃을 여미게 된다. 펼쳐져 있던 옷가지며 살림도 정리해야 할 것만 같다. 난방 연료가 얼마 남아 있는지도 살펴보게 된다. 이렇게 주변을 살피다보면 나의 마음 속 깊은 곳도 살피고 챙기고 돌아보게 된다.
올해도 어김없이 태풍이 상륙했다. 12호 태풍 오마이스가 할퀸 자국은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는 쓰린 상처이다. 자연의 재해지만 피해가 없도록 예방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아직 조락의 계절은 아니다. 나무들은 한여름처럼 푸르고 작물들도 익어가고 있다. 하지만 열매들이 익어간다는 것은 안으로, 안으로 응집한다는 말이다. 속으로,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우리 역시 마음으로,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계절인 것이다.
이렇게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는 마음은 조용하고도 경건하다. 햇빛과 물과 하늘에 대한 감사함으로 가득 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