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 조은경 작가
그 날은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도 아니었다. 비가 많이 오다가 갑자기 활짝 개어 마음이 부풀어 오르던 날도 아니었다. 평범한 날이었다. 날씨는 대충 개어 있었고 아침녘이라 바람은 잔잔했다.

남편과 나의 아침 식사도 조용했다. 여느 날처럼 앞에 멀리 보이는 침수정 정자를 바라보며 조상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품은 채, 조근 조근 얘기를 나누면서 아침 식사를 거의 끝내던 참이었다.

접시는 거의 비어 있었고 우리들의 커피 잔도 대충 비워져 가던 때였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오늘의 아침식사가 여니 날과 다른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어제의 아침식사와도 다른 것을 알아차렸다. 그건 바로 음악이었다. 음악이 없었던 것이다.

작년, 우리 집을 방문해서 우정을 두터이 했던 테너 한 분이 직접 준 성악 모음 디스크를 일 년 가까이 아침 식사마다 듣곤 했는데 그날 우리는 그 음악을 듣지 않고 식사를 끝내버린 것이다.
 
이럴 수가! 황당했다. 매일 같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면서 틀게 되면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에 맞추어 10개의 노래가 끝이 난다. 이런 매일의 리츄얼을 우린 사랑했다. 가끔씩 그 노래 아니고 다른 종류의 음악을 틀은 적은 있었지 만 다시 이 디스크로 되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음악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우린 그날, 음악 없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식사를 끝내버린 것이다.
 
그날 아침의 충격은 꽤 오래 갔다. 누군가는 너무 호들갑 떤다고 말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백지는 내게 놀라움이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날 앞뒤의 정황, 예를 들어, 날씨라든가 전날의 특별한 뉴스라든가, 친지, 친척들의 조금은 특별한 정황 같은 것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며 뭔가 조금이라도 다른 상태에 꿰어 맞추려고 힘썼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날 아침은 정말 평범했다. 평범한 날씨에 평범한 마음과 건강 상태였다. 한참 생각하다가 그만 생각하기를 멈춰버렸다.
 
그래,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항상 똑같은 일의 반복이어야만 하는 거야? 내 생각의 어느 한 부분이 반란을 일으킨 거지. 남편의 반란도 우연히 같은 때에 일어난 거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우린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이름붙인 그러한 행동으로. 그러자 충격은 사라져갔다.

옛날 읽었던 짧은 이야기가 기억난다. 한 사나이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원수의 집에 문지기로 취직한다. 몇 번인가 복수의 시도가 무위로 끝나고 사나이는 점차 노인이 되어간다. 그러면서 왜 자신이 주인을 죽여야 하는지 이유를 점차 잊어버린다.
 
내가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아마 내가 받은 충격 밑바닥 정서에는 치매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런 일이 앞으로 자주 생기면 어떡하나? 이렇게 되더라도 이젠 어쩔 수 없는 나이도 되지 않았나? 잊어버렸다고 충격 먹었던 사실, 그 자체를 잊어버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지금 코로나 19라는 미증유의 팬데믹 사태를 겪고 있다. 내가 아침에 언제나처럼 삶을 시작하는 리츄얼을 하루 잊어버린 것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질병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치매나 암 등, 아직 백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병들이 즐비하다. 인생의 지뢰밭을 이제까지 조심해서 피해왔다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그런 행운이 따른다는 보장은 없지만 사실 우리는 인생을 지뢰밭이라고 알고 지내온 것은 아니다. 삶은 그저 우리가 보듬어야 할 소중한 것으로 알고 살아왔다.
 
비가 종일 온다. 가을비라 농부들은 걱정이 많다. 이 계절에 비가 반가운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태풍처럼 억센 바람을 동반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종일 줄기차게 내리지만 단시간의 폭우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올해의 날씨가 그래도 다행인 거라고 작년을 기억하는 농부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럴 땐 작년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에 좋다.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거야.’ 가끔 이런 말을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듣곤 한다. 책임지기 어려운 말이다. 이유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기가 너무나 어려워서다. 좋은 의미에서라면 (누구에게 감사를 표한다는 의미에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빨리빨리 은혜를 갚는 것이 좋고, 나쁜 의미에서라면 다만 말로 그치기를 바란다. 위에서 인용한 이야기에서처럼, 원수를 갚는 것 정도의 중요한 일도 당장 하지 않으면 기억이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기억과 망각 사이는, 또는 그 차이는 종이 한 장 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누구나 감사한 일은 잊지 않기를 바라고, 나쁜 일은 빨리 잊혀 지기를 바란다. 현실에선 반대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그러니 다만 좋은 일들이, 작은 행복이, 잊혀 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기억해야겠다. 그것이 나약한(?) 인간이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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