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석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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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대와 차기정부에 ‘폭탄돌리기’ 당장 멈춰야
신흥국 부채가 ‘블랙스완(Black Swan, 예기치 못한 위기)’의 도화선(導火線)이 될 수 있다는 세계적 경제학자들의 지적이 잇따르지만 나랏빚에 대한 우리 정부와 정치권의 모럴 해저드(moral hazard, 도덕적 해이)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여당은 내년 국가 부채가 1,000조 원을 넘는데도 더 쓰지 못해 안달이다.
차기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브레이크를 걸어도 늦지 않다며 자신들은 ‘나 몰라라’하며 할 수 있는 한 돈을 마구 쓰겠다는 심산이다.
나중에 어떻게 되든 포퓰리즘으로 유권자의 환심을 사는 일이라면 마다 할 이유가 없다는 듯 나라 곳간을 비우는 것을 개의치 않고 있다. 브레이크 없는 폭주(暴走) 기관차가 따로 없다. 이런 무책임과 방약무인(傍若無人) 오불관언(吾不關焉) 후안무치(厚顔無恥)를 과연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
납세자인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이같은 ‘폭탄돌리기’는 미래세대에게 크나큰 짐이자 재앙으로 돌아갈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함에도 정치권은 손을 놓고 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상황이라 그런지 야권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짝짜꿍이다.
중앙정부 기준 국가채무가 올들어 8개월간 100조원 이상 급증하면서 사상 최초로 ‘국가채무 1000조원’에 근접해지고 있다. 나랏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통제 불능으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오죽하면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지난달 “나라 곳간이 쌓여 가는 게 아니라 비어 가고 있어 상당 부분 어려운 상황” “국가 채무 증가 속도가 가파르다고 생각한다”라고 했겠는가.
취임 1000일을 넘긴 홍 부총리는 역대 최장수 경제부총리로 추가경정예산을 포함해 모두 10차례 예산을 편성하며 문재인 정부 확장 재정 기조의 선봉장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랬던 그가 재정에 빨간불이 들어왔음을 시인한 것이다.
홍 부총리 발언은 임기 내내 확장 재정 기조를 유지하며 낙관론을 펼쳤던 문재인 정부 기조와는 온도 차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대한민국의 재정과 경제력은 매우 건전하다”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건전성이 양호하고 여력이 있다”며 이른바 ‘돈 풀기’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그간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던 국가채무비율 40%도 “근거가 뭐냐”는 대통령 한마디에 무너졌다.
전임자들이 여리박빙(如履薄氷)의 자세로 지켜온 마지노선이 한번 무너지자 국가채무는 급속도로 불어났다. 그럼에도 늘어나는 국가채무의 고삐를 잡기 위한 안전장치인 재정준칙(財政準則)은 작년 말 국회에 제출된 뒤 방치되고 있다.
‘한국형 재정준칙’ 법제화가 늦어지면 재정건전성 제고 노력에 대한 국제 신용평가사들의 신뢰가 약화될 우려가 있다는 IMF(국제통화기금) 관계자의 경고가 무색할 지경이다.
기획재정부가 2025년 도입을 목표로 추진 중인 재정준칙은 △국가채무 비율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60% 이하로 유지 △통합재정수지(총수입-총지출)를 GDP 대비 -3% 이하로 유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재부는 이같은 재정준칙을 담은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작년 12월 발의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 7월 연례협의에서 재정준칙 달성 가능성을 묻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여야 정치권은 대선을 앞두고 각종 포퓰리즘 공약을 쏟아내고 있어 내년에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국가채무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내년도 정부 씀씀이가 600조원을 넘어서면서 문재인 정부 임기 중에 결국 국가채무가 1000조원을 돌파하게 됐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사상 처음으로 50%를 넘게 된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국가채무는 올해 965조3000억원에서 내년 1068조3000억원으로 103조원(10.7%) 늘어난다. 문재인 정부 임기 첫해인 2017년(660조2000억원)과 비교하면 5년 만에 408조1000억원 늘어나는 것이다. 임기 내내 하루 평균 2235억원의 빚을 낸 셈이다.
2014년(533조2000억원) 500조원을 넘어섰던 국가채무는 8년 만에 2배가 됐다. 증가한 535조1000억원의 81%가 현 정부 임기 중에 늘었다. 5년간 늘어난 국가채무 408조원은 역대 정부 최대다. 이명박 정부 시절 글로벌 금융 위기 대응으로 증가한 국가채무가 180조8000억원이었는데 2배가 넘는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재임 기간을 합친 9년간 증가액(351조2000억원)보다 많다.
국가채무 총액은 박근혜 정부 말기 660조원에서 내년 1068조원으로, 단기간에 600조원이 급증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약 70년 동안 발생한 국가채무 누적액 660조원과 비숫한 규모의 나랏빚이 지난 5년의 짧은 기간에 증가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복지 지출 확대 등을 명분으로, 코로나 이후에는 방역과 민생 지원을 내걸고 ‘수퍼 예산안’을 편성하며 나랏빚을 늘려왔기 때문이다.
복지 지출 확대 등으로 국가채무는 차기 정부 4년 차인 2025년 1408조5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기재부는 전망했다. 국가채무비율은 58.8%로 치솟게 된다.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통합재정수지는 내년 55조6000억원 적자로 전망되는데, 2025년에는 72조6000억원까지 불어나게 된다. 미래 세대의 부담을 고려하지 않은 확장 재정으로 재정 관리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재정지출이 과도하게 늘면서 급증한 나랏빚이 근본 문제다. 정부 씀씀이가 가파르게 증가했고, 이에 따라 기하급수로 팽창하는 국가채무는 이제 국내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최근 IMF의 ‘재정점검 보고서’에서도 과속하는 한국의 확장재정이 지적됐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지난해 47.9%에서 2026년에는 66.7%가 될 것이란 전망이다.
채무 증가 자체는 실상 새로울 것도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IMF가 선진국으로 분류한 35개국 가운데 한국 나랏빚 증가속도가 1등이라는 사실이다.
역대 정부에서 국가총생산액(GDP) 대비 국채비율 40% 선 방어가 목표였다. 2017년 36%이던 국채비율이 단숨에 50%를 넘어섰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특수 요인은 선진국 모두의 공통 사항인데 우리나라만 유독 국가채무 증가속도가 세계 최고다.
정부는 2025년의 국채비율을 58.8%로 60% 이내를 2차 방어선으로 목표를 세웠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은 5년 후 국채비율을 69.7%로 훨씬 나쁘게 전망한다.
재정 방어선은 일단 무너지면 정치인들은 자기 임기 중에 인기 유지를 위해 재정의 건전성 확보에 관심이 작아져 재정파탄으로 발전할 소지가 크다.
재정 전문가들은 “나랏빚이 GDP의 절반을 넘어섰다는 것은 심리적 마지노선을 깨뜨린 것”이라며 “향후 세수(稅收)나 성장세가 나아진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재정 상황은 정부 전망보다 더 빠르게 악화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경제연구원(KERI)은 국가채무가 급증하면서 2038년에는 국민 1인당 1억원이 넘는 국가채무를 짊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내년엔 1인당 2000만원꼴인데, 16년 만에 5배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것이다.
연구원은 “국가채무 증가세에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더해지며 1인당 국가채무 부담도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국가채무는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진 빚만을 더한 것이다. 국가가 암묵적으로 보증을 서는 공공기관의 채무,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 지급을 위한 연금충당부채는 국가채무 통계에서 빠져 있다.
불어난 예산은 결국 국민 세금으로 채워야 한다. 정부는 내년 국세(國稅)가 338조6000억원 걷힐 것으로 전망했다. 올해 본예산 당시 국세 수입 전망과 비교하면 19.8%(55조9000억원) 늘어난 수치다. 외환 위기 이후 경제 회복기에 접어들었던 2000년(22.7%) 이후 22년 만에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세금이 늘면서 내년 조세부담률이 20.7%로, 사상 처음으로 20%를 넘어설 것으로 정부는 추산했다. 조세총액(국세·지방세 총합)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뜻하는 조세부담률은 2017년 18.8%에서 2018·2019년엔 19.9%로 올랐으나, 2020년엔 19.2%, 2021년엔 18.7%로 내렸었다.
조세총액에 국민연금·건강보험 등 사회보장성기금의 합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인 국민부담률도 내년 28.6%에 달한다. 2025년엔 29.2%로 급등할 전망이다.
여기에 물가까지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생산자물가지수는 10개월 연속 올라 지난 8월 역대 최고치인 110,72를 기록했다. 백신접종 확대로 코로나가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도 앞으로의 물가 전망을 낙관하지 않고 있다. 지난 15일 기재부의 ‘최근 경제동향’ 자료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소비자물가상승률은 6개월 연속 정부 목표치인 2.0%(글로벌 물가상승률 목표치)를 웃돌고 있는데, 이달에는 3%대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재정과 관련해 물가문제를 엄중하게 다뤄야 하는 이유는 재정적자가 계속 쌓여서 결국 높은 물가상승률을 만들어내는 데다 한번 적자에 빠진 재정은 쉽게 돌아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과 중국 등 부채의 덫에 걸린 글로벌 경제가 최대의 이슈가 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빚내고 돈 풀어 버틴 코로나 시대에 유동성(流動性)의 역습(逆襲)이 시작된 것.
미국의 국가 부채와 중국의 기업 부채 문제가 드러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이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국가부도 우려와 중국 헝다그룹 파산 위기가 대표적이다.
그동안 과감한 재정·통화정책으로 급한 불을 껐지만 미국의 국가 부채 131%, 중국의 기업부채 161%로 각각 급증하는 등 부채에 의한 성장의 한계를 노출하면서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가 최근 내년 예산안과 함께 내놓은 2021∼2025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국가채무비율은 내년 50%를 넘은 뒤 2023년 53.1%, 2024년 56.1%, 2025년 58.8%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정부는 2023년 이후부터는 경제회복 추이에 맞춰 총지출 증가율을 점진적으로 하향 조정해 2025년에는 경상성장률 수준으로 조정하는 등 재정 총량을 관리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는 현 정부의 생각일 뿐 차기 정부가 이를 지킬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내년에 들어설 새 정부가 공약 이행을 위해 지출을 늘릴 경우 국가부채 증가 속도는 더욱 빨라질 수 있다.
한 경제학자는 “정부가 내년 예산 증가율을 8%대로 잡아놓고 차기 정부에 5%대로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하면 지켜지겠느냐”면서 “사실상 내년 1분기에 임기가 종료되는 정부라면 중립적 재정을 짜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재정은 한 번 늘려 패턴화해놓으면 줄이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가채무가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에서 작년 12월 말 국회에 제출된 재정준칙(국가재정법 개정안)에 대해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정권을 잡을 경우 예산 운용의 족쇄가 되기 때문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나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재정준칙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것은 포퓰리즘 정책 수행을 위해 국가재정을 마구 써 국가채무를 잔뜩 불린 정부가 “가계부채가 위험하다“며 1800조원을 넘어선 가계 대출 축소를 위해 대출을 조이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는 이중적 행태를 보인 것. 자신에겐 관대하면서 남에겐 추상(秋霜)같은 이런 내로남불에 성난 민심에 결국 금융위가 지난 14일 보름만에 ‘전세대출 규제’를 푸는 오락가락 해프닝을 연출했다.
청와대가 대선을 앞둔 상태에서 실수요자들의 불만을 부담스러워하자 급선회한 것인데, 시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을 벌이다 시장에 혼선과 불안감만 키웠다는 비판이 나온다.
내년 3월 선거를 앞두고 대선 주자들은 경쟁적으로 ‘퍼주기 공약’에 나서고 있다. ‘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대출’이 간판인 이재명 경기지사뿐 아니라 “무주택 청년가구에 원가주택 5년내 30만호 공급”(윤석열), “생애 첫 주택 구매시 정부가 집값 50% 공동투자”(원희룡) 등 여야가 따로 없다. 재원조달방법은 ‘뜬구름 잡기’ 식이다.
제20대 대통령선거(내년 3월 9일)가 시시각각 다가오면서 후보가 차츰 윤곽을 드러내고 있지만 재정과 나라살림 운영의 바른 방향에 대한 주장이나 담론(談論)이 안 보인다. ‘대장동 게이트’ 같은 의혹거리도 당연히 규명돼야 한다. 지지층을 의식한 인기영합성 발언도 선거철이란 점을 감안하면 영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 해도 위험수위인 국가채무 관리, 재정운용 원칙, 지출 구조조정, 정부수입 증대방안에 대한 방향이나 구상과 대안은 나와야 한다. 국가 운영의 기본이 배제된 채 정치공방이나 보고 ‘국정 경영자’를 뽑을 수는 없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