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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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가 영글어 커지기 시작하면 나무에서 직접 따먹는 맛이 기막히다. 긴 장대를 통해 감도 딴다. 고추는 거의 다 땄고 누렇게 익은 놈을 골라가며 콩도 수확한다. 지난 주 친구들이 왔을 때 같이 땅을 파서 얻은 고구마도 상자 가득 있다.
아쉽게도 땅콩의 수확이 부실하다. 내년엔 미리 땅콩 밭에 비료를 충분이 깔아서 잘 길러봐야겠다는 결심이 생긴다. 땅콩을 깨끗이 씻어 겉껍질을 까니 겨우 한 공기 정도 된 것을 프라이팬에 볶아서 예쁜 유리병에 넣어 두었다. 가끔 마시는 와인의 안주감이다.
메밀 씨 뿌려 놓으면 조금 컸을 때 나물하면 된다고 형님이 말해서 그대로 했다. 먹다 남은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더니 하얀 꽃을 피운다. 놓아두고 보기만 해도 예쁘다.
실란트로(고수)는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작년 자리에서 그대로 싹튼 놈들이 한창이다. 너무 많으니 일부는 채취해서 녹즙을 해야 할 것 같다.
8월 말에 시기를 놓치지 않고 심은 배추와 무도 순조롭게 잘 자라고 있다.
자라는 모습을 보려고 미리 심어둔 클로버도 영양이 좋은지 크게 자랐다. 매번 잔디에 섞여서 자라게 되면 미움을 받으면서 제거 대상이 되는 클로버가 우리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것에 다 이유가 있다. 우리가 조성 중인 과일나무 정원인 동림원의 바닥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에 클로버를 생각해내고 씨를 구해 미리 심어보았다. 발아율은 90프로 이상이었다. 안심하고 동림원에 모두 뿌렸다.
시골은 이제 바야흐로 가을의 최고점에 달했다. 산마다 밤도 영글었다.
어디를 쳐다보아도 풍요로움이 가득하다.
가을이 짙어가면서 한해살이 식물들이 후손을 퍼뜨리는 방식이 신비하게 다가온다. 집 주위의 잡초 밭에 많이 보이는 것으로 ‘도깨비바늘’이라는 노란빛 작은 꽃이 있다. 그 꽃이 지면서 씨들은 이름 그대로 도깨비바늘이 되는데 그 바늘이 지나가는 사람의 옷에 무수히 붙는 것이다.
내가 심은 작물 옆에 나타나는 잡초들의 모습이 서로 비슷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무심코 보아 같은 놈인 줄 알고 뽑지 않았다가 얼마 자라고 나면 그 가운데 작물들이 잡초에 전부 휩싸여 존재감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신기하게 보았던 일들과 비슷한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느낀다. 자세히 관찰하면 저마다 생존을 유지하려고 모든 생물들이 애쓰는 것을 느낀다.
형님이 밤 한 봉지를 가지고 왔다. 함께 산에 올라가서 밤을 따야 하는데 내가 바쁜 듯해서인지 가자고 하질 않았나 보다. 미안했다.
“형님, 어떻게 그냥 먹어요? 죄송하네요.”
“근데 올해는 큰 밤송이가 아예 안 보이더라고. 왜 그런지 모르겠네. 많이 줄 것도 없네.”
“우리 집 감나무가 바로 그렇잖아요. 하나도 수확 못 했어요.”
“그래도 밤은 다르지. 한 두 나무가 아니잖아. 이상하네. 작년만 해도 큰 놈들이 많았는데, 그렇지 않아? 올해는 어찌된 셈인지........”
시골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난다. 남편의 8촌 형수님인 이 형님 내외분의 도움이 없었으면 내가 이곳에서 행복하게 정착할 수 있었을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분이다.
다음날은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나머지 콩을 모두 수확했다. 64년 만에 처음 찾아온 10월 중순의 한파라고 했다. 다행히 이곳 영천에선 영하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해지기 전에 텃밭 정리를 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겨울옷을 꺼냈다.
그날 밤 잠을 청할 무렵이었다. 갑자기 며칠 전 본 남자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일주일에 두 번, 요가 배우고 오면서 항상 동림원에 주차하고 새로 자라기 시작한 클로버를 관찰하곤 한다. 그날도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고 들어가는데 처음 보는 큰 차가 주차되어 있다. 차종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큰 SUV 이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보는데 덩치가 큰 남자 둘이 엄청 큰 뚱뚱한 자루 하나를 메고 온다. 차에 실으려는 모양새다. -저게 무얼까?-란 생각과 –저 사람들이 이 근처에서 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 남자들도 나를 잠깐 일별하고는 고개를 바로 돌리는 눈치다. 모르는 남자 둘이 왠지 무서운 생각도 들어서 그대로 차를 빼서 돌아왔다. 이제 생각하니 그 두 남자가 아마도.......
그리고 그 자루 속에 든 것이 바로.......
과연 나의 추측이 맞는 걸까? 그 자리서 알았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했지? 동림원 바로 건너 실개천 너머가 형님네의 밤나무 밭이다. 그러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이 망상일까?
다시 곰곰 생각을 돌이키니 그 큰 마대 자루는 곡식 자루처럼 표면이 매끈하지 않았다. 울퉁불퉁해 보였다. 그러니 그 속에 든 것이 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잠은 어디로 달아나고 이 얘기를 형님한테 해야 할지, 또 경찰한테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덩치도 크고 인물들도 희고 멀끔한 남자들이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 가득 찬 밤을 팔아 그들은 과연 얼마만큼 돈을 벌었을까? 그것으로 뭘 하려고 했을까? 큰 밤이 없다고 서운해 하던 형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처음 그 산에 형님과 아주버님 두 분이 한 그루 한그루 밤나무를 심었다던 이야기도 떠오른다.
내가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루니 잠자던 남편이 깨 버렸다. 이야기를 들려주니 한 번 웃고는 잠이나 자라고 한다. 잠을 청하면서 왠지 모를 슬픔에 잠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