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래 투데이코리아 편집국장
▲ 조용래 투데이코리아 편집국장
30년을 먼저 살아내신 어머니와 30살 어린 딸이 있다. 어머니의 여망과 딸의 요구 사이에서 난감하다. 30년 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30년 후로 서둘러 달려갈 수도 없는 우리 세대는 외롭다. 가운데 낀 우리는 “확낀자”다. 이준석이 말했듯 “우리는 포위됐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광화문에 갔다. 내가 촛불을 들고 박근혜 탄핵을 외칠 때 태극기 집회로 발걸음을 옮기던 노모의 뒷모습을 보며 안타깝고 미안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현직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했던 노모와 구속, 처벌을 주장했던 아들 사이의 간격은 아직까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그동안 공정과 정의는 얼마나 실현됐을까. 그 겨울의 광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원했던가.
 
20대 대통령 선거 토론회를 보다가 노모와 충돌했다.
"느그가 그 시대를 우째 안단 말이고? 느그들이 틀맀다“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한두 번 시도한 게 아니지만, 문재인과 종북 좌파를 동의어로 인식하는 노모를 더 설득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나는 사상을 달리하는 아들로 어머니의 기억에 남게 됐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어른들의 시대를 이해하는 데 한계는 너무도 분명하다.
 
“아빠가 우리를 어떻게 알아요? 아빠도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많은 모순과 싸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당황케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이내 깨달았다. 그녀들의 페미니즘을 적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기는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녀들이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솔직히 모르고 있었다. 알고 싶기나 했었나.
 
우리는 완전히 포위됐다. 말과 글로 저항해볼 순 있다. 하지만 어떻게 대항해도 결과는 뻔하다. 이겨도 아프고 져도 슬프다. 사랑하는 두 여성과의 싸움은 무조건 지는 승부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망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야 하나.

부모의 시대를 이해하고 바뀌는 우리 시대를 설득했어야 했다. 바빴고 치열했던데다, 어른들이 우리 얘기를 소상히 들어주는 분들도 아니었다고 변명한다. 자신들이 이룬 성과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자긍심 앞에서 우린 의논 상대가 아니기도 했다. 역시 핑계다.
 
그렇다고 자식들과 대화를 나누고 살뜰하게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와 학원에서 보냈다. 귀중한 여유 시간은 게임으로 대체됐다. 그들만의 세계에서 그들의 언어로 정체성을 만드는 동안 우리는 기성세대가 됐고 그들은 성인이 됐다. 게임 세계의 즐거움에 몰입된 그들을 이해해주지 못했던 부모와 소통이 되기란 진즉에 틀려먹었을지도 모른다. 자식과 부모 세대, 분리된 두 세계의 간격은 그렇게 벌어져 왔던 게 아닐까.
 
이준석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우리가 포위된 건 아니다. 그는 우리 시대의 나태함과 무성의함을 정확히 포착했고 그들의 세계관 밖으로 몰아냈을 뿐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게임의 전략이 현실의 선거전에 차용됐을 때 눈치를 채긴 했지만, 이미 늦었다. 게임이든 선거든 그들의 세계에선 피아 구분이 우선이고 이기는 것만이 선이다. 무엇과 싸우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게임의 양상은 이미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고 보면 우리의 실패는 예견됐던 일이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우리 시대엔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같은 기술적인 것부터 고도의 심리 게임인 ‘왕게임’ 같은 게 있었다. 가위, 바위, 보로 권력 서열이 정해지면 왕은 신하나 노예에게 사소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어제 따갔던 딱지와 구슬 일부를 계급에 따라 세금으로 징수했다. 왕의 하굣길 책가방은 노예가 들어 주어야 했다. 오늘은 내가 왕이지만 내일은 친구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매일 함께 놀아야 하는 친구의 마음을 친절히 읽어주어야 했으므로 서로가 무리한 책임은 지우지 못했다.
 
요즘 청소년 세대는 비대면 온라인 게임을 한다. 상대가 보이지 않는 게임에선 이기는 것만이 목표다. 게임 세계에서 패배는 악이다. 이기는 전략과 전술 외엔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할 필요가 없다. 전략을 공유하는 동지와 쓰러뜨려야 하는 적으로 철저히 갈라치기를 한다. 적으로 규정된 무리는 다시 나누고 분열시킨다. 소통과 배려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현실 세계의 생존 방식과 비대면 가상현실에서 훈련된 그들의 행동양식이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진 게 아닐까. 우리는 분명 더 적극적으로 자식들 세대와 대화를 이어갔어야 했다. 우리는 그 점을 간과했고 실패했다.
 
전자 교환식 전화기가 보급되던 시절, 길거리 공중전화 부스를 가리키며 아버지가 물었다. “D.D.D.(장거리 직통 전화, Direct Distance Dialing), 저 글자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
머리를 긁으며 답을 못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두환이(전두환) 대가리는 돌대가리다’의 약자다.”
 
당시 시대정신은 군사독재와 반민주에 대한 반항이었다. 광포한 독재에 대놓고 맞서지 못하고 두려워했지만, 국민은 뒤돌아서 통치자를 조롱하고 손가락질했다. 아들은 권위주의와 독재에 대한 아버지의 비아냥거림을 온몸으로 느끼며 어른이 됐다. 이미 고인이 된 누군가를 욕보이자는 의도는 전혀 없다.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일그러진 시대에 대한 아버지의 저항 의식이 어린 아들에게 전승된 건강한 과정에 관한 얘기다.
 
잘살아 보자, 열심히 살았다 변명해도 돌이켜보면 반성밖에 할 게 없다. 하지만 이제라도 양극단에 서 있는 노모와 자식 모두에게 우리 시대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우리가 부모 세대로부터 무엇을 이전받았는지, 무엇을 못 받았는지, 자식들에겐 무엇을 전수해 주었어야 했는지, 어째서 해주지 못했는지 말이다.
 
우리가 원했던 민주주의와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어 놓고도 무엇을 더 하지 못했는지, 왜 지금 이모양 이꼴로 포위됐는지 말이다. 코로나 확진자는 시간이 가면 거의 낫는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낀 게을렀던 우리가 지금 바뀌지 않으면 끝까지 ‘확낀자’로 살다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모, 자식과의 대화와 설명에 더는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비록 포위됐지만, 나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할 마음이 없다. 목숨만은 살려 준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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