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 조은경 작가
딸네 식구들과 함께 보내느라 영천을 열흘 쯤 비웠다가 돌아왔다.

집 안팎에 잔디가 자란 것은 봐줄만 했지만 텃밭으로 눈을 돌리자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바랭이가 키 크게 가득 텃밭을 메워서 내가 심은 작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일홍과 백합꽃이 목울대를 올려 턱 밑까지 쫓아온 잡초 군락에서 살아나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사흘 동안 잡초의 키를 낮추느라 작두와 원예용 가위를 썼다. 다음 사흘은 잡초의 뿌리를 제거하는 일로 보냈다. 전부 다 뽑지는 못했지만 텃밭의 모습은 그런대로 되돌아왔다.

빨갛게 익은 토마토에 연하게 익은 호박이며 가지를 바구니 가득 수확해 올 수 있었다. 텃밭에서 얻은 야채로 샐러드를 만들어 아침 식사를 장만하자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가끔씩 영천을 떠나 있는 것도 좋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은 더 좋았다. 도시 생활 중 불었던 체중도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정겨운 시골 생활 속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돌아보니 주위는 모두 초록색을 띈 식물들로 가득 차 있다. 시골의 정취는 이 초록 식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내가 키우는 사랑스런 식물들과 이제 막 전쟁을 치룬 잡초들과는 뭐가 얼마나 다른 것일까?
 
마침 오늘 도착한 –농민신문-이 그 해답에 실마리를 주었다. 칼럼 한 곳에서는 나처럼 –풀과의 전쟁-에 대한 소회를 쓴 분이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양파가 수확이 가까워서 도복하는 것이 식물의 지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있었다. 그 분이 추천하는 책을 주문해서 읽어 보았다.

이탈리아 생물학자 스테파노 만쿠소가 쓴 –매혹하는 식물의 뇌-란 책이다.

이 책에서 본 충격적인 사실을 말하자면 식물이 만물 중에서 가장 우세한 종류라고 강조하는 부분이다. 지구의 육상 환경에서 식물이 98.8%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단다. 나머지 부분이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란다. 인간이 사라진다면 그 빈자리를 식물이 금방 메꾸겠지만 식물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생명을 영위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긴 우리가 생각해 봐도 인간의 식량도 곡물, 식용 동물의 식량도 곡물이 주가 아닌가? 그러니 아쉬운 것은 인간이지 식물이 아닐 것이다. 식량뿐인가? 인간이 병이 들었을 때 치유 물질로 손꼽히는 것이 식물이다. 직접 섭취하는 것에서부터 추출물을 이용한 건강식품이나 병원 약의 주성분까지, 식물이 관여하지 않고는 치유 물질을 생각할 수가 없다. 식물이 자신의 몸을 위해서 약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여분의 양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생태계가 조화를 이루고 살아남도록 식물이 신경을 써 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렇게 스테파노 만쿠소는 식물이 고통 받는 다른 종들에 대한 연민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한다. 생태계가 건강하게 존재하도록 식물의 뇌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동물처럼 눈이나 코 귀와 같이 특별한 기관이 없다 하더라도 식물은 자신의 몸 전체에서 보고 냄새 맡고 듣는다는 것이다.

농부들이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을 옛날부터 해 왔다. 귀가 없지만 작물이 듣는다는 것을 농부들은 경험으로 안 것이다. 물을 찾아, 양분을 찾아 땅 밑을 뚫어가는 뿌리는 뇌에 해당할 것이다.

실제로 식물학자들은 옥수수의 뿌리가 땅에 수많은 잔뿌리를 뻗는 것을 보고 그 하나하나의 근단 (뿌리 끝 조직)이 뇌에 해당한다는 가설을 진행해왔다.
 
식물이 전 생태계에 연민을 갖는 존재라는 가설은 나를 안심시킨다. 이렇게 사방이 식물의 푸른색으로 꽉 차 있는 시골이라는 장소에서 식물들이 동물이나 인간 등, 다른 종류의 생물체에 대해서 적대적이라면 얼마나 무서울까? 밤새 호박의 줄기가 집 쪽으로 뻗어 창문을 덮어 버린다면? 나무가 환삼덩굴의 줄기에 꽁꽁 포박당하는 것처럼 식물이 우리 인간을 공격한다면? 식물들끼리는 그런 일이 가끔씩 벌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양지바른 곳으로 줄기가 움직인다거나 굵은 줄기 옆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한 듯 보이는 식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우리 인간에 대해서 적대적인 식물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독버섯이나 식충식물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섭취하지만 않으면, 건드리지만 않으면 된다. 존재 자체로 인간에게 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식물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는 대가로 식물을 괴롭히는 해충을 퇴치해 주고 바이러스로 일어나는 병을 고쳐준다. 식물의 광합성으로 생성되는 산소를 마시고 인간이 생명을 영위하는 것과 같이 인간과 식물은 상호보완적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 작물들의 최종 목적이 우리 인간의 의도와 어느 정도 다르더라도 결국 인간이 원하는 대로 성장하고 열매를 맺어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
 
초록으로 감싸인 전원 속에서 식물들에게 바치는 감사는 끝이 없다. 민들레도, 쇠비름이라 불리는 오행초도, 질경이도 닭의장풀도 잡초가 아니라 아침 식사에 오르는 샐러드의 일부다. 스스로 우리의 식량이 되어주는 귀한 식물이다. 내가 모종을 심어 가꾸는 로메인 상추나 비트, 케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오늘 아침도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텃밭으로 출근한다.
밤새 자란 오이, 고추, 토마토를 점검하고 수확한다.
슬그머니 남의 영역으로 침범한 호박의 넝쿨을 다듬는다. 길게 자란 바랭이 뿌리를 제거한다.
식물들이 내 텃밭에 사는 한 내 마음대로 키우고 다듬고 보살피고 조종할 수 있는 생사여탈권을 가졌지만 그것을 행사하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식물도 지능이 있다지만 지능이 앞선 인간임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식물에게서 먹이를 얻는 빚을 잊지 않아야 할 순간이다.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