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석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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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개척정신, 지도자 리더십이 국가 命運 좌우
스페인은 35년 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처음 방문한 데 이어, 빌바오 등 여러 도시를 가본 적이 있었으나 포르투갈과 모로코 땅은 처음 밟았다.
이번에 특히 스페인 포르투갈을 찾은 것은 4년 전 한달 가까이 멕시코 쿠바 파나마 코스타리카 페루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 브라질 등 중남미 9개국을 여행하면서 실로 많은 것을 보고 느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어떻든 이들 중남미국가 탄생의 근원(根源)과 배경을 탐색해보고 싶은 강렬한 욕구 때문이었다.
물론 위대한 건축물과 음식, 춤과 노래 회화 조각 등 예술, 현지인들의 일상이 관심 밖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유럽의 변방인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어떻게 15~16세기 대항해시대의 문(門)을 열어젖힌 역사의 주역이 됐는지 그 배경과 동인(動因)을 탐색하는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이들 국가가 신항로개척의 주인공인 된 것은 지도자의 선견지명(先見之明) 리더십과 다른 선택지가 없는 데 따른 절박함,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궁즉통(窮卽通),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의 전형적인 사례인 것이다.
먼저 포르투갈을 보자.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 작은 나라다. 남북으로 대서양에 면한 포르투갈은 땅이 척박해 일찍이 바다를 향해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항해왕자’로 불리는 주앙1세의 셋째아들 엔히크(Henrique de Avis, 1394~1460) 왕자가 대항해시대의 문을 연 주인공.
동쪽은 당시 가장 강력한 카스티야 왕국이었다. 이사벨 여왕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랍통치세력인 무어인들을 축출하고 되찾은 제국이다.
국경의 서쪽은 거친 바다 대서양이었다. 먹고 살길을 찾아야 했던 약소국 포르투갈은 동쪽의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통해 뻗어나갈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할 수 없이 바다로 눈길을 돌려야 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생존을 위해서는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의 세계(世界)로 향하는 방법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바다에 대해 축적된 이론이나 연구가 없이 무지했다. 이는 포르투갈의 일만은 아니었다. 큰 배를 만들어야 바다로 나갈 수 있었지만 기술이 부족했다. 연안을 넘어 멀리 대서양은 이들에게 말 그대로 공포와 죽음의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도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엔히크 왕자는 유럽대륙의 땅끝 사그레스에 항해학교를 세우고 전 유럽과 물러간 이슬람 세력권에서 인재를 끌어모았다. 이론적 깊이는 없었지만 바다 경험이 있는 항해, 천문, 지리, 선박조선 전문가들을 수소문해 불러들였다.
왕자의 간곡한 설득에 중세 기사들은 말을 버리고 항구로 모였다. 수많은 시간을 들여 반복된 노력 끝에 작은 범선 캐러벨을 만들었다. 기존의 소형 배들을 기초로 개조한 최초의 큰 배였다. 대양에 대한 인간의 첫 도전장이었던 셈이다. 선박이 마련되자 이들은 모두 배에 올랐다.
리스본은 개척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항구 바닷가에 우뚝 선 디스커버리 탑,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캐러벨의 갑판을 상징하는 거대한 석조 기념물은 올려다보는 이를 압도했다. 엔히크 왕자와 그를 따른 수많은 장인들, 기사들이 용감한 자세로 도열한 조각상은 실제의 비장함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시선은 한결같이 두려움의 바다, 대서양을 향하고 있었다.
초기 바다를 향한 이들은 조잡한 범선(帆船)과 낡은 항해술로 숱한 시련과 맞딱뜨려야 했다. 괴혈병(壞血病, 비타민 C부족)으로 선원의 반이 죽어나가는 고통이 덮쳤다. 끈질긴 도전 끝에 포르투갈인들은 마침내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덕분이었다. 향료와 차, 비단 같은 사치품과 노예를 획득했다. 부국(富國)으로 가는 최고의 상품들을 손에 넣은 것.
디스커버리 탑은 포르투갈이 주최한 세계박람회(1940)때 처음 만들어졌다. 그 후 앤히크 왕자 서거 500주년을 추모하면서(1960) 거대한 현재의 탑이 완성되었다.
광활한 해변 광장에는 멋진 나침반 모자이크와 세계지도가 칼라스톤으로 바닥에 장식되어 있었다. 이스트 탑과 웨스트 탑에는 33명의 당대 개척자들이 용기있는 표정으로 도열해 있었다.
동탑에는 엔히크 왕자와 인도항로를 개척하고 세 차례나 그곳을 다녀온 포르투갈의 영웅 바스코 다 가마를 비롯해 브라질을 발견한 페드로 카브랄, 최초의 세계일주를 달성한 탐험가 마젤란, 희망봉을 처음 발견한 디아스 등 16명의 조각상이 사선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서탑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 곤잘레스와 베네딕트 정교회 소속의 선교사들, 시인 루이스, 작가 핀투와 지도제작자, 과학자, 그리스 기사단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중세 개척시대를 증언하고 있었다.
주인공 엔히크 왕자는 공작이면서 그리스 기사단 단장이었다. 향락과 사치놀음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왕자는 다른 쪽에 시선을 돌렸다. 높은 지위를 이용해 자금과 사람을 불러모았다. 최초의 항해 학교를 열고 수많은 항해사들을 길러냈다. 아라비아와 유대인 수학자들을 리스본으로 초청해 지도를 제작하고 천문, 지리, 의학을 연구했다. 선박 건조에 온 힘을 기울인 주인공이었다.
포르투갈 왕실은 집중된 투자로 무역통로를 개척하고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현재까지 옛 영광이 유지되는 카나리아제도, 아조레스 제도, 마데이라 군도는 물론 세네갈과 가나 등 중부 아프리카 항로와 무역거점도 이때 만들어낸 수확이었다.
본토 해안선만 1230 킬로미터에 이르는 포르투갈은 아조레스 제도 , 마데이라 군도까지 합하면 세계적인 해양국이다. 긴 해안선은 대양의 꿈을 키우기에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앤히크 왕자 등장 이전까진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불가능의 비전이었다.
1415년 모로코 해안 세우타(현재 스페인령) 점령을 시작으로 600여 년 동안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이 탄생 유지되었다. 세계사 최초의 사건이었다. 1821년 독립한 브라질을 비롯해 1970년대 독립한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앙골라, 1999년 중국에 반환된 마카오까지 제국의 명맥이 이어졌다.
훗날 대항해시대의 개척자들로 평가되었지만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제국의 영광이나 역사적인 사명감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 동기에서 시작된 투쟁이었다. 경제적 여유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조건 바다로 나간 것이 가장 큰 동기였다. 돈 벌어 풍요를 누리기 위한 욕망이 빚어낸 결과였다. 인도항로 무역은 엔히크 사후에도 이어졌다. 포르투갈의 성공은 유럽 사람들을 자극했다. 대항해시대의 서막은 이렇게 열렸다.
스페인 이사벨여왕은 어떤가.
711년, 이슬람 세력은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유럽 내 본거지를 이베리아반도에 구축했다. 그 대표적인 왕국이 무어인(Moor, 아랍계와 베르베르족의 후손)의 그라나다이다.
이베리아 반도에는 수차례 전쟁을 거친 후 포르투갈, 카스티야, 아라곤, 그라나다 등이 공존했다. 그리고 유럽의 가톨릭 왕가와 로마 교황 특히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 아라곤 왕국에겐 숙명 같은 의무가 생겼다. ‘레콩키스타(Reconquista)’ 즉 ‘이교도에게 빼앗긴 국토회복운동’이었다. 이는 가톨릭 교인으로서 책무이자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왕국의 국왕의 의무였다. 무엇보다 로마 교황의 종교적 후원을 받고 유럽의 강자로 등장하는 길이었기 때문. 하지만 레콩키스타는 8세기부터 16세기까지 무려 800년간 지속되며 유럽의 ‘풀지 못하는 숙제’가 되었다.
이 유럽의 숙원을 풀어낸 영웅이 바로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1세이다.
1492년 1월,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마침내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의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를 되찾기 전까지 절대 군복을 벗지 않겠다"고 맹세했을 정도로 국토회복(Reconquista)에 강한 열망을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그라나다를 탈환하고 이슬람 세력을 아프리카로 쫓아내면서 분열된 이베리아반도의 모든 왕국을 스페인으로 통일했다. 그 공으로 스페인 사람들은 이사벨 여왕을 ‘통일 스페인의 어머니’ ‘할머니’라는 호칭으로 존경과 애정을 보내고 있다.
이사벨 여왕은 신념과 그 신념의 실천을 일치시킨 리더였다. 그녀는 스페인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인 카스티야의 공주로 태어났지만 숱한 어려움과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카스티야 왕인 이복오빠 엔리카 4세의 집중 견제를 받아 어린 나이에 왕궁에서 쫓겨나 많은 고난을 겪으며 목숨을 건 권력투쟁 끝에 스페인 여왕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여왕 이사벨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그녀는 성직과 영주를 겸임한 귀족들의 저항과 내란, 포르투갈, 프랑스 등 통일 스페인을 두려워한 유럽 각 나라의 견제, 신권(神權)을 무기로 스페인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교황 등 내외부의 위협과 갈등을 이겨내고 약 200년간 ‘스페인 황금시대’를 연 영민(英敏)한 리더였다.
이사벨 여왕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0~1506)다.
콜럼버스 후원은 역사를 바꾼 이사벨 여왕의 결정적 선택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이사벨여왕을 찾아왔다. 신대륙항해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당시 스페인은 이슬람과 10년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국고가 텅비어 있었다. 더구나 남편 페르난도(아라곤 왕)는 관심이 지중해에만 쏠려있었다.
여왕은 콜럼버스의 말에 흥미를 느꼈다. 주변의 반대가 심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숙원이었던 그라나다 왕국의 정복으로 여유가 생기자 여왕은 그동안 계속 협상을 해 왔던 콜럼버스를 불렀다. 신대륙 개척을 위한 후원을 받으려 8년 동안 유럽 왕가를 떠돈 콜럼버스였다. 1492년 4월 마침내 둘은 최종 담판에 도달했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항해에 대해 비용 등 모두 후원하기로 했다. 이사벨 여왕은 자신의 개인 패물을 팔아 지원했다. 그 대신, 그가 발견할 모든 땅은 스페인 왕국에 귀속시키며, 콜럼버스에게는 세습적인 대제독 직위와, 발견한 땅에서 나는 산물의 10%에 대한 권리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세척의 범선에 90명의 선원을 태우고 세비야 인근의 팔로스항을 출발했다. 그리고 10월 12일 바하마제도에 도착했고, 이듬해 3월 첫번째 항해에서 돌아왔다.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녀가 콜럼버스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던 배경으로,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등 개척에 자극을 받은 점, 영토개척을 통한 가톨릭 전파라는 목적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녀의 열망은 결국 신의 한 수가 되었고 스페인은 남북 아메리카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유럽의 강자가 될 수 있었다.
숨은 진주를 발견한 여왕의 선견지명과 혜안(慧眼)이 놀랍다.
이사벨 여왕의 리더십이 존중받는 것은 그녀의 냉정하고 정확한 판단력과 대의(大義)를 위해 비판을 감수해내는 책임감, 그러면서도 따뜻한 애민정신이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 아니 '신항로를 개척'하여 스페인에 부와 영광을 안겨주었던 세계적인 탐험가 콜럼버스. 오랜 세월 탐험과 모험의 대명사로 불려지던 대표적인 이름이지만, 실제 그에 대한 평가는 ‘위대한 탐험가’ 또는 ‘약탈자’ 등 시대와 나라에 따라 극과 극을 이룰 정도로 다르다.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으로 인도를 찾아 몇번의 항해를 떠나지만 끝내 인도는 찾지 못하고, 새 식민지에서도 큰 이익을 내지 못하자 결국 스페인 왕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된 그는 온갖 멸시와 냉대 속에서 노년을 보내다 55세의 나이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스페인 왕실에 대한 서운함과 배신감이 컸던 탓이었는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아주 유명한데, “죽어서도 스페인 땅은 절대 밟지 않겠다”라는 유언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모험가답게 죽어서도 여기저기 떠돌다 결국은 다시 스페인 땅으로 돌아오게 된 콜럼버스의 관(棺)은 현재 세비야 대성당안에 안치되어있는데, 그 모습이 사뭇 독특하다.
땅속이 아닌 네 조각상의 어깨 위에 들려있는 관.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콜럼버스의 묘이다. 각각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의 왕으로 콜럼버스가 한창 항해를 하던 당시 스페인을 구성하고 있던 나라들이다.
앞쪽의 고개를 당당히 들고 있는 두 왕과 뒷쪽의 고개를 푹 숙인 두 왕의 모습이 흥미롭다. 정면에 노를 들고 있는 왼쪽이 바로 콜럼버스를 후원하며 스페인의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여왕이고, 사자휘장의 옷을 입은 오른쪽은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레온왕인데, 두 왕 모두 콜럼버스에게 호의적이었다.
뒤편에는 이사벨여왕과 함께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한 그녀의 남편 페르난도 아라곤 왕과 나바라의 왕이 나란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두 왕 모두 콜럼버스의 항해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들이 콜럼버스의 관을 메고 있는 것은 그가 죽어서도 땅에 닿지 않고 항해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서운했던 그의 마음에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을는지.
이와는 대조적인 장면이 명나라 정화(鄭和)함대의 이야기다.
중국 명나라 3대 황제인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1360~1424)는 야심찬 인물이었다. 팽창정책을 추진한 그의 위세는 아시아를 넘어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에 까지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의 정복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운남성 출신의 이슬람교도이자 환관인 정화(鄭和)를 내세운 남해 원정이었다. 당시 정화의 함대는 역사 이래 최대의 선단으로 평가된다. 1405년 1차 원정 때 선단의 규모는 배 60여 척에 탑승선원의 숫자가 3만 명에 육박했고 가장 큰 배는 약 8천 톤 규모였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대항해에 나서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동해안의 케냐까지 이르렀다. 그 사업은 조공(朝貢)체제의 확대를 목표로 삼았고 명나라의 관료들에 의해 추진됐다. 그리고 경제적 바탕도 기업가 정신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 웅장한 대원정의 모험은 엄청난 국력을 소모 시키고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채 역사의 그늘로 사라져 버렸다. 북쪽 세력의 남하에 대처하는 것이 급하다며 스스로 바다를 버린 해금(海禁, sea ban)정책을 편 것.
정화의 인도양 원정 반세기 뒤 콜럼버스는 120명의 선원이 부리는 3척의 배를 이끌고 대서양 횡단에 나섰다. 중국의 함대와는 비교가 되지않는 이 작은 함대는 제노바 출신 선장의 기업가 정신과 중국과 일본으로 가는 새로운 무역로를 찾기 위한 상업적인 목표 덕분에 세계의 역사를 바꿨다. 항해가 성공하면 큰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70일 간의 긴 항해를 끝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492년부터 1502년까지 콜럼버스가 스페인 국왕의 지원을 받아 네 차례나 대서양을 항해한 것도 향료를 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1498년 5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함대가 2만여 해리를 항해해 희망봉을 돌아 인도 캘커타(오늘날의 콜카타)에 도착했다. 그는 1,700톤의 후추, 400톤의 계피와 말린 정향, 육두구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값어치는 원정에 들어간 전체 비용의 60배에 달했다고 한다.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과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 인류역사의 장대한 제국반열에 올라선 것은 고단한 현실을 넘어서려는 결단이 비결이었다. 간절함이 담긴 도전은 이 세상에서 늘 유효한 결과로 끝을 맺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고상한 명분과 이상론은 미래의 대안(代案)이 될 수 없다. 정치적 이념의 대결은 세월이 가면 무익하고 허무하다. 실용적 이념에 사활을 걸어야 희망이 있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다. 바로 우리 사회에 부족한 '다양성', '관용', '개방'의 창의적인 기반과 문화를 제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금 세대보다 미래세대를 위해 더욱 필요하다. 일상 현안(懸案)에 쫓기다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 미래는 더욱 암울해질 수 있다. 모름지기 국가지도자는 간절함으로 무장해 신념과 그 신념의 실천을 일치시키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엄중한 안보위기와 정치 경제 사회적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역사에서 배우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