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 박현채 주필
오는 19일 만료되는 우크라이나 ‘흑해 곡물 협정’(Black Sea Grain Initiative) 연장 협상이 11일 제네바에서 유엔과 러시아 간에 시작된다. 정통한 소식통은 UN 사무총장이 이날 러시아 대표단과 만나 흑해 곡물 수출 계약 연장과 관련해 러시아 식품과 비료의 세계 시장 선적을 원활하게 하는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협정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봉쇄된 흑해 항로를 열어 러시아와 우크라 양국의 곡물과 비료를 안전하게 수출입할 수 있도록 유엔과 튀르키예(터키)의 중재로 러시아와 우크라니나 간에 7월 22일 체결됐었다.
 
흑해는 세계 최대 밀, 옥수수, 해바라기유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의 주요 수출통로인 만큼 러시아가 협정 갱신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세계 곡물 가격이 또다시 요동칠 것이 분명하다. UN에 따르면 우크라 전쟁 발발로 수천만 명이 식량난에 봉착하는 등 세계 식량 위기가 조성됐으나 이 협정 체결로 1,000만 톤 이상의 식량이 우크라이나에서 수출돼 세계 식량난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 협정 연장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오는 19일 만료된다.
 
국제 곡물값 하락을 이끈 이 협정의 갱신 여부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다. 크림반도에 주둔한 자국 함대와 민간 선박이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지난 10월 29일 곡물 수출 협정 중단을 선언했다가 나흘만인 10월 2일 다시 복귀한 러시아가 계속 으름장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보장을 어길 경우 협정을 탈퇴할 권리를 여전히 갖고 있다”고 말했다.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부 차관도 “협정 연장 문제는 모든 부분에서 협정의 이행 상황을 고려해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협정 복귀가 협정 연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 협정 연장 여부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재확인했다.
이에 따라 UN은 러시아가 협정 연장에 동의하도록 하기 위해 러시아 비료 수출에 대한 서방측의 제재를 완화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제사회는 “러시아가 협정 연장에 응하지 않는 것은 우크라 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곡물·비료의 주된 수출 루트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면서 러시아에 갱신 동의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발표에 따르면 지난 10월 세계 곡물 가격지수는 전달보다 3.0% 올랐다. 곡물 가격지수는 지난 5월 정점을 찍은 뒤 8월까지 내림세를 보였지만 9월 반등세로 들아선 뒤 10월까지 두 달째 올랐다. 이는 흑해 곡물 협정의 불확실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국제 곡물가격은 협정 체결로 흑해 3개 항구를 통해 우크라이나가 밀 등 농산물 수출을 재개하면서 안정화됐으나 러시아의 협정 중단 기간 중에 일시 상승세를 보이는 등 위기감이 고조된 바 있다.
 
향후 국제 곡물 가격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전반적으로 보합 상황이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파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남미의 기상 상황과 흑해 곡물 협정의 연장 여부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협정이 갱신되지 않아 우크라이나가 다시 식량 수출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경우 세계 곡물가격은 재차 오를 것이 분명하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촉발된 '푸드플레이션'이 재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는 쌀 이외에 밀과 옥수수 등 주요 곡믈 거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 협정의 갱신 여부가 우리 경제에 무척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당초 정부는 10월쯤이면 물가가 정점을 찍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물가 상승 폭이 석달 만에 다시 커지면서 이같은 예측이 빗나갔다. 만약 흑해 곡물 협정이 갱신되지 않는 등 변수가 생길 경우 다시 6%대로 치솟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동절기에는 에너지로 인한 물가 상방 요인이 있어 부담이 크다. 또한 겨울 철새 도래로 조류인플루엔자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고 우유 ‘원유’ 수매 가격이 내년부터 리터 당 49원 인상된다. 아이스크림, 제빵, 유제품 가공 상품이 원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내년에 줄줄이 인상될 전망이다. 흑해 협정 연장 불발로 세계 곡물시장이 다시 악화될 경우, 가뜩이 어려운 서민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 질 것으로 우려된다. <투데이코리아 주필>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