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참사‘, 公僕의식·책임감 결여·안전불감증 ’눈살‘

▲ 류석호 교수
▲ 류석호 교수
‘이태원 참사’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침통한 상황에서 답답한 마음에 ‘징비록(懲毖錄)’을 다시 꺼내 읽어본다.

명재상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이 7년간의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을 겪어내고 조정에서 물러나 “후손들은 이 지옥 같은 전란을 두 번 다시 겪지 말라”며 전란 중에 겪었던 성패(成敗)의 자취를 곰곰이 반성, 고찰하여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써 내려간 반성문이다.

"나와 같은 보잘것 없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版國)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形勢)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전시 정국의 최고 책임자로서 전쟁 처리의 잘못을 통감하고 국가에 사죄하는 뜻으로 이 기록을 남긴다고 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중요성과 공직자의 책임의식, 위민정신(爲民精神)을 이처럼 생생하고 절절하게 웅변하는 기록물은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다.

징비록을 대하면서 오늘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이 오버랩된다.

400여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와 고위 공직자들의 처세는 과연 어떠한가.

지난달 29일, 서울 한복판 이태원 골목에서 158명의 생때같은 젊은 목숨들이 속절없이 스러져간지 벌써 보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껏 이번 참사와 관련해 스스로 사표를 내거나 책임을 진 고위 공직자는 단 한명도 없다. “핼러윈 때 안전사고가 날 수 있다”고 우려하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부당하게 삭제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입건된 서울 용산경찰서 전 정보계장과, 서울시에서 안전 관리 업무를 맡았던 안전지원과장이 지난 11일 각각 극단적 선택을 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사고 발생 사흘만에, 윤석열 대통령은 9일만에 각각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일반 국민이 생각하기에 만시지탄(晩時之歎)의 사과였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치적 책임의 귀착점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용산구·서울시 등 지자체와 경찰의 과실 책임을 묻는 동시에 지방자치와 경찰행정의 소관부처인 행안부 장관의 정책 책임도 함께 물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이태원 핼러윈 참사는 발생 이후의 ‘대응’보다 발생 이전의 ‘대비’에 더 절실한 요구가 있었다. 행안부 장관의 ‘정치적 책임’이 더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민들 사이에서도 이태원 핼러윈 참사의 책임을 지고 경찰과 소방, 지방자치단체를 총괄하고 있는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참사를 뒤늦게 인지한 것도 모자라 참사 이후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발언까지 알려지면서 해임 여론은 더욱 확대됐다.

이 장관은 사고 발생 1시간 5분이 지난 오후 11시 20분, 행안부가 소방청으로부터 보고받은 ‘소방대응 2단계’ 발령 사실을 알리는 긴급문자메시지를 보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참사 직후 “경찰을 미리 배치했어도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예년의 경우와 다르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다” 등의 발언을 두고 여당 내에서도 이 장관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11월 8일 한 언론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지고 이상민 장관이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이 57%에 달했다. 시민 10명 중 7명이 참사의 책임이 대통령실과 행정안전부, 경찰청 등 정부에 있고, 그중 대통령실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참사 발생 이후 보름이 흘렀으나 지금까지 이상민 장관의 자진사퇴나 대통령의 장관 파면 결정은 없다. 정치적 책임을 요구하는 여론에 윤석열 대통령은 경찰 책임론을 내세우며 선을 그었다. 11월 7일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에서 경찰을 강도 높게 질책했다.

윤 대통령은 “안전사고를 예방해야 할 책임은 경찰에게 있다”라며 “엄연히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책임이)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하는 것이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지라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같은 날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현안질의에서 이상민 장관은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한 적은 없다”며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11월 8일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 출석한 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이상민 장관 유임 기류를 좀더 명확히 시사했다. 김 비서실장은 이 장관의 거취에 대해 “지금은 사의를 논의할 때가 아니고 사고 원인 분석부터 전념하겠다는 뜻”이라며 “무슨 사건이 났다고 장관·총리 다 날리면, 새로 임명하는 데 두 달 넘게 걸린다. 그 공백을 어떻게 하나. 매번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장관 바꿔라’, ‘청장 바꿔라’ 이것도 후진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상민 장관은 지난 12일 한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번 참사에 대한 자신의 책임론에 대해 “누군들 폼 나게 사표를 던지고 싶지 않겠냐”고 발언, 듣는 이의 귀를 의심케 했다.

여기에 더해 지난 8일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 대통령실 국정감사에서 ‘웃기고 있네’ 필담 논란을 일으킨 김은혜 홍보수석과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의 사례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주무부처 수장인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고 집권 여당이 통렬한 반성과 쇄신의 목소리조차 내지 않는다면 이에 대한 비용은 추후 여당이 고스란히 치러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많은 전문가들은 경찰의 책임만 추궁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행안부 장관이 사전·사후 대응을 못 했다는 걸 누가 봐도 알기 때문에 장관을 포함해 고위 담당자들이 당연히 인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통령이 ‘정치적 책임’을 요구하는 여론에 “막연하다”고 선을 긋자, 사후 대책이 경찰의 ‘법적 책임’에만 집중되리란 관측이 나온다.

윤 대통령이 방향을 잡은 것도 수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현장에서 고생하고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가 된 경찰관들이나 소방공무원들이 이상민 장관의 지휘를 따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물어보나 마나다. 실제 경찰 내에서는 불만도 상당하다. 재난안전법상 경찰은 긴급구조지원기관에 불과한데 재난관리시스템을 따지지 않고 모든 것을 경찰 탓으로만 몰아가면 본질적 해결이 안 된다는 시각이다. 지자체나 소방 등에 비해 경찰의 초기 미흡한 대처가 불거져 국민적 분노가 쏠렸고 이 때문에 경찰을 희생양으로 삼는 게 아니냐는 우려다.

참사를 전후로 경찰의 사전 대비·사후 대응이 마비 상태나 다름없었던 건 사실이다. 참사 4시간 전인 6시 34분부터 112신고센터에는 인파로 인한 인명사고 위험이 있다는 취지의 신고가 11차례 이어졌다. 이태원파출소 경찰관들은 용산서에 경비인력 파견을 요청했다. 용산서가 이를 서울경찰청에 보고했지만 경비인력의 투입은 없었다. 집회·시위에 대규모 인력이 투입됐다고는 하지만, 가용할 만한 인력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속속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경찰 대응의 마비 배경에는 지휘의 공백과 무너진 보고체계가 있었다. 치안 최고 책임자인 윤희근 경찰청장과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의 행태와 대처 능력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던 이들 중 즉각 사과하거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은 없다.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던 이들이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모양새다. 이번 참사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문제라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실무자들의 태만이 문제일 수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정책결정자의 총체적 대응 부실, 나아가 재난관리시스템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형사책임은 물론 이를 넘어서는 폭넓은 범위의 조사가 필요하고 이에 대한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함께 물어야 하는 이유다.

‘이태원 참사’는 재난관리 역량과 안전불감증, 공복(公僕)의식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총체적 난맥상을 연출했다는 얘기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사흘 전 경찰과 용산구청,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 등이 간담회를 열었지만 사실상 아무런 안전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고 한다. 축제기간 성범죄와 마약 등 범죄 예방과 방역 수칙만 논의했다고 한다. 참사가 발생한 29일 인파가 10만 여명 몰렸는데도 차량 통제나 폴리스라인 설치를 통한 인도 확보 같은 대책은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축제가 ‘주최자 없는 행사’였기 때문이란다. 경찰도 주최자가 없는 행사에선 시민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것을 막을 권한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진작에 군중 밀집도에 대한 안전 기준을 만들고 국민 스스로도 질서있게 행동하는 것을 체질화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 대목이다.

경찰은 사고 당일인 지난 29일 오후 6시 무렵부터 사고가 일어난 밤 10시 15분쯤까지 이태원 일대의 안전문제와 관련한 112 신고가 11건 접수됐지만 ‘일반적인 불편신고’로 판단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고내용엔 당시의 위급한 상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경찰이 공개한 신고내용을 보면 오후 6시 34분 “압사당할 것 같다”는 첫 신고가 들어온 이후 “사람들이 몰려 쓰러진다” “통제가 안 된다” “아수라장이다” “대형사고 일보직전”이란 신고가 연이어 접수됐다. 참사 4시간 전부터 사고 위험을 알리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사실상 방치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용산구청이 ‘이태원 핼로윈 참사’ 당시 행정안전부와 서울시로부터 ‘주민들에게 재난문자를 발송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도 78분간 재난 문자를 보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재난 발생과 관련한 ‘하인리히 법칙’에 따르면, 한 번의 큰 사고 전에는 300번의 징후와 29번의 경고가 있다고 한다. 이런 하인리히법칙, 일명 1:29:300 법칙은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그와 관련된 수 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큰 사고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게 아니라, 그 이전에 반드시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는 얘기다.

이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위기관리 10계명’(전성철 박사 지음)을 읽지 않은 것 같다.

위기의 순간 위기대응팀 조직, 행동 정리, 사실관계 재구성, 커뮤니케이션 원칙 확립, 정보 수집, 협상 등 위기관리의 필수요소를 제대로 짚어가며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가야 한다는 내용을 숙지했더라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뭣보다 비상사태 발생 시 정확한 상황 판단과 기민한 대처, 진정성 있는 소통과 겸손한 자세가 필수적 요소임에도 고위 공직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특히 이번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외국 언론의 시각은 뼈아프다.

미국 유력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가 ‘이태원 핼러윈 참사’를 두고 한국이 27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를 겪고도 비슷한 사고를 막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WP는 지난 4일(현지시간) ‘이태원 핼러윈 참사, 1995년 삼풍 붕괴의 유령을 소환하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삼풍 이후에도 한국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일각에서 제기된다”고 보도했다.

WP는 1995년 502명이 숨진 상품 백화점 붕괴사고에 대해 “현대화의 열망 속에 건설업자와 공무원들이 안전조치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면서 “한국이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무엇을 용인해왔는지 보여준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WP는 당시 삼풍백화점에는 사고 직전까지 붕괴 조짐이 차고 넘쳤는데도 백화점 경영진이나 관련 당국 공무원들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사고 이후에는 사회 지도층이 연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면서 당시 건축물 안전에 대한 정부 감독이 강화되고, 과실치사에 대한 처벌 강도가 높아지는 등 제도적 보완이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150여명이 숨진 이태원 참사도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WP는 삼풍 참사가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에 경종을 울렸다면, 이태원 참사는 한국이 문화 중심지로서 전 세계에 존재감을 높이던 중에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참사 장소였던 이태원이 한류(韓流, hallyu)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는 ‘안전 사회’에 대한 국민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저버렸다. 희생자 158명 중에는 외국인도 26명 있다. 잘 사는 나라 한국, 그것도 수도 한복판에서 참극이 발생한 사실을 이들 유족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치안이 불안한 중앙아시아권 학생들에게 한국은 유학지로 인기가 높다. 총기 소지도 불허하고, 밤에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범죄의 타깃이 될 확률이 낮다. 이들이 한국행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국민은 오로지 ‘안전한 대한민국’을 바랐다.

대한민국이 세계 무역규모 순위 8위, 경제규모 10위, K-컬처, K방산 등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자긍심이 이번 참사로 크게 손상됐다.

잊을만 하면 터져 나오는 각종 재난 및 안전사고로 국가브랜드가 큰 타격을 입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왜 우리는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가.

대한민국이 ‘재난공화국’이라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오명(汚名)을 또다시 뒤집어 써야 되겠는가.

이번 기회에 뼈를 깎는 자세로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과 공직자들의 공복(公僕)의식을 새롭게 가다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깊은 자괴감마저 든다.

"국비기국(國非基國)."

1582년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200년 동안 저축해 온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도 없다’는 내용과 함께 당시 선조에게 올렸던 상소문(진시폐소·陳時弊疏)의 한 구절이다.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은 440년 전에도 그토록 외쳤던 말이었다. 진정으로 역사가 그대로 반복되길 원치 않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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