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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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2일 윤석열 대통령은 영화 관계자들을 만찬에 초청해 이같이 말했다. 예술 영역에 있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셈이다. 그런데, 최근 윤 정부가 상반되는 행동을 보이고 있어 문화계 블랙리스트 시대가 열린 것 아니냐는 여론이 나오고 있다.
윤 대통령이 문화예술계에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기조를 언론에 발표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만평 ‘윤석열차’를 “정치적인 주제를 노골적으로 다룬 작품”이라며 만화영상진흥원에 경고 조치를 내렸다. 김건희 영부인의 논문 표절 의혹을 풍자한 만화 <멤버 유지(member yuji)>는 500점이 소개되는 부천 한국만화박물관 전시에서 유일하게 제외됐다.
문화예술계에 제재를 가하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일각에서는 윤 정권의 블랙리스트 시대가 도래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앞서 지난 21일 <JTBC>는 '행정안전부 측이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공연 예정이었던 가수 이랑의 곡을 사전에 검열했다'라는 내용을 담아 단독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부마항쟁기념재단(이하 부마재단)은 이랑 측에게 올해 기념식에서 그의 대표곡인 <늑대가 나타났다>를 불러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연 주최 당시 부마재단은 “해당 곡의 가사(배고픈 사람들은/ 들판의 콩을 주워다 먹어 치우고/ 부자들의 곡물 창고를 습격했다/ 늑대가 나타났다)가 마치 부마민주항쟁의 당사자들이 겪었던 이야기인 것처럼 들렸다”라고 전했다.
그런데, 공연을 20일 앞둔 시점에서 행안부가 돌연 재단 측에 “<늑대가 나타났다>를 공연에서 빼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공연을 담당한 강상우 감독은 “(재단 측이 행안부의) 지시를 수행하지 않으면 재단의 존립이 위험하다는 말을 했다”라고 전했다. 이어 재단 관계자는 “행안부가 별 탈 없기를 바라는 무색무취의 기념식을 원해서 (해당 곡을 제외하게 됐다)”라고 증언했다.
이랑과 감독 측이 지시 수행을 거부하자, 재단은 가수와 감독을 교체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초 배정된 감독 연출료 1천만 원, 가수 공연비 700만 원 등 정산금 또한 변경됐다. 가수 이랑은 공연 두 달 전부터 연주자들과 공연 준비를 해왔지만, 관련 용역회사는 “연출자와 가수를 합쳐 700만 원만 지급하겠다”라고 통보했다.
사건 이후 연출자와 이랑 측은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맡았던 변호인을 선임해 국가배상소송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행안부는 <JTBC> 단독 보도 다음 날인 22일 설명자료를 통해 “행안부는 기념식 행사에서 특정 곡을 검열한 사실이 없으며, 총감독과 가수 교체를 요청한 사실 또한 없다”라고 해명했다.
문화사회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문화운동단체인 ‘문화연대’는 이날 오후 서울 마포구 인근에서 토론회 ‘문화정책이 사라진 시대, 윤석열 정부를 평가한다’를 개최해 “윤 정부 문화정책의 방향성 및 예산 편성 구조를 볼 때 최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다시 작동하고 있다”라며 “블랙리스트 부활은 이미 예견된 사태”라고 주장했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 또한 이날 입장문을 통해 “부당한 권리침해에 함께 맞서겠다”라며 “행안부는 즉각 이랑 님과 함께 공연을 준비한 모든 분들께 사과하고, 관련 비용을 정산하며, 책임 있는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정의당 의원실 관계자는 지난 24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현재 상황을 지켜보고 있고 행안부에 자료를 요구한 상태”라며 “(행안부로부터) 자료를 받아 확인한 뒤, 필요시 보도자료를 제작해 배포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전했다.
한편, 이랑은 사건 발생 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늑대가 안 나타났다”라는 게시글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