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석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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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랑 일깨운 국가대표들의 감동 드라마
2022 카타르 월드컵에 출전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꺾이지 않는 의지’와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는 환상적이었다.
지난달 24일 월드컵 H조 조별리그 1차전 우루과이를 시작으로 가나, 포르투갈과의 경기, 6일 새벽 세계 최강 브라질과의 16강전에 이르기까지 4경기 하나 하나가 시종 가슴뛰게 하는 명장면을 연출했다.
비록 16강전에서 월드컵 최다 우승국(5회)이자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후보 브라질에 1-4로 패했지만, 선수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마지막까지 분투했다. 크리스 셔튼 영국 공영방송 BBC 해설위원이 “한국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고개를 떨구고 있을 수도 있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끝까지 경기를 했다”라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정도니까.
12년만의 본선 무대에서 펼쳐보인 태극전사들의 모습은 이제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서 괄목할만한 경쟁력을 갖췄다는 것을 증명했다.
경기력과 경기내용, 준비과정 등 어느 것 하나 크게 나무랄 게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특히 상대가 어떤 팀이든, 어떤 스타일로 경기를 하든,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위축되거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맞서는 투혼과 정신력은 32개 참가국 중 단연 최고라는 것이 많은 세계 축구전문가들의 평가다. 여기에 기술력도 세계를 경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예선 H조 3차전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종료 직전 보여준 ‘마스크맨(배트맨)‘ 주장 손흥민과 햄스트링(hamstring, 넓적다리뒤근육) 부상으로 이날 처음으로 갓 경기장을 밟은 황소 황희찬의 콤비플레이는 단연 압권이었다.
한국이 이 경기 막판 역전승으로 본선 16강에 오르자 외신들도 이를 극적인 승부로 일제히 주목했다. 외신들은 특히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이어진 토너먼트 출전권 경쟁을 주목하며 태극전사들의 투혼에 찬사를 보냈다.
AP통신은 한국과 우루과이의 숨 막히는 막판 살얼음판 경쟁을 월드컵 본선의 역사를 장식할 드라마로 평가했다.
통신은 "한국이 다득점에 우위를 주는 동률 배제원칙(타이브레이커)으로 16강에 진출해 우루과이를 조 3위(탈락)로 밀어낸 것은 월드컵 92년 역사에서 가장 격정적으로 마감된 조별리그 가운데 하나"라고 해설했다.
포르투갈전 후반 추가시간 1분 손흥민은 70m를 내달렸고, 포르투갈 수비진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황희찬에게 절묘한 패스를 내줘 천금같은 결승골을 만들게 했다. 손흥민은 경기 막판 마스크(안면 보호대)를 벗어 던지고 뛰었다. 마스크가 불편했는지 손에 마스크를 쥐고 경기를 소화했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기 때문이 아니었다.
경기 후 취재진이 손흥민에게 이제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지 묻자 “사실 벗으면 안된다”고 답했다. 이어 그는 “수술을 언제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제 한 달 정도 됐다. 뼈가 붙는데 최소 석 달은 필요하다. 이제 뼈가 실처럼 붙었다고 해도 모자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손흥민이 이렇게까지 위험 부담감을 안고 뛰는 이유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그 팀을 이끄는 주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는 “저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위치다. 제가 좋아서, 해야 할 임무를 알고 있다. 그 순간에 마스크를 벗었다고 앞으로도 마스크를 벗을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엄청난 리스크를 가지고 경기를 하고 있다. 좋아진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해야 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우리가 진 건 손흥민(30·토트넘)처럼 위기 때 팀을 하나로 이끌어갈 리더가 없었기 때문이다.”
페르난두 산투스 포르투갈 축구 대표팀 감독은 H조 최종 3차전에서 한국에 1-2로 패한 뒤 이렇게 말했다. 이날 승리로 한국이 역대 세 번째 월드컵 16강 토너먼트 진출에 성공하면서 선수단의 ‘흥’을 끌어올린 손흥민의 리더십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영국 ‘스카이 스포츠’는 “손흥민이 이타적인 플레이를 선보이면서 팀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했던) 2002년 정신을 소환했다”며 “손흥민은 결국 황희찬(26·울버햄프턴)의 결승 득점을 도우면서 (3일 이 경기가 열린) 에듀케이션시티 스타디움을 한국 팬들의 축하 파티 무대로 만들었다.”고 평했다.
황희찬도 같은 매체 인터뷰에서 “흥민 형이 경기 전에 ‘너를 믿는다. 오늘 꼭 기회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며 “형이 포르투갈 골대 쪽으로 공을 몰고 갈 때 (페널티) 박스에서 나를 찾을 것이라는 확신을 안고 뛰었다. 패스가 정말 좋아서 나는 그저 받아서 넣기만 하면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손흥민은 경기 후 “주장인 내가 부족했는데 동료들이 커버해줬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우리 팀을 이끌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나는 우리 대표팀 선수들이 더 높은 위치로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서 “동료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잘 버텨주고 잘 희생해주고 잘 싸워준 덕에 이길 수 있었다”고 공을 돌렸다.
이날 손흥민과 호날두가 보여준 주장 완장의 무게는 분명 달랐다. 'ESPN'이 바친 헌사(獻辭)대로 손흥민은 캡틴이자 리더, 그리고 레전드다.
국가대표팀 주장의 품격과 자세에 숙연해진다.
어디 손흥민 뿐이랴.
1차전 우루과이 공격수 누네스를 막던 ’괴물 수비수’ 김민재는 잔디에 미끄러지면서 오른쪽 종아리 부위를 다쳤다. 고통을 호소하던 김민재는 치료를 받고 곧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가뜩이나 왼손에 부상까지 있는 상황에서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하지만 수비의 핵심 김민재가 한시라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가나와의 2차전 전날까지도 정상적으로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으나, 극적으로 선발명단에 포함돼 부상을 참으며 최선을 다했으나 팀은 3- 2로 패했고, 결국 무리한 탓으로 포르투갈과의 3차전엔 뛰지 못했다.
역전골의 주인공 황희찬은 경기 이후 부상 부위인 햄스트링에 통증을 안고 골을 넣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사실 경기장에 들어갔을 때 살짝 아팠던 부분이 있었다"며 "너무 멀었지만 흥민이 형이 수비수를 끌어주고 기다려서 믿고 뛰어갔다. 패스 길이 딱 하나밖에 없었는데 흥민이 형이 거기로 잘 줘서 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황희찬은 부상에 대해 "앞선 두 경기에 못 나오는 동안 팀 동료들이 아픈 상황에서도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많이 나왔다"며 "두 번째 경기 끝나고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뭐라도 힘이 돼야겠다는 각오로 세 번째 경기를 준비했고 다행히 부상에서 회복해 경기장에 나왔다"고 말했다.
지극한 동료애와 협동심으로 똘똘 뭉친 ‘원팀정신‘의 완전체를 본다.
여기에 파울루 벤투 감독(53, 포르투갈)의 뚝심과 지략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을 이끈 외국인 감독이다. 2018년 7월 사령탑에 올라 본인만의 뚜렷한 축구 철학을 보여준 벤투 감독은 선수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텁다. 벤투 감독의 모습에서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끌었던 또 다른 외국인 감독, 거스 히딩크(76, 네덜란드)가 보인다는 이야기가 많다.
벤투 감독이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들고 온 전술은 ‘빌드업(build up) 축구’다. 수비진에서부터 뚜렷한 목표를 가진 패스로 전진하는 방식이다. 문전으로 공을 멀리 보내 승부를 거는 기존의 한국과는 달랐다. 상대가 강할수록 더 높은 완성도가 요구되기 때문에 월드컵에서는 상대적인 약팀인 한국이 수비 위주로 임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지만, 벤투 감독은 결국 대표팀의 체질을 바꿔 16강 진출을 일궈냈다.
2001년 1월 부임한 히딩크 감독은 18개월 동안 ‘압박 축구’를 한국에 이식했다. 수비는 수비수만 하는 것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깨고 위치와 상관없이 공을 가진 상대 선수를 포위하는 전술로 한국을 4강으로 이끌었다.
올해 여름부터 벤투 감독은 ‘왜 이강인을 쓰지 않느냐’는 원성을 여러 곳에서 들었다. 스페인에서 뛰는 이강인(21·마요르카)이 소속 팀에서 매 경기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던 때였다. 결국 벤투 감독은 지난 9월 평가전 때 1년 6개월 만에 이강인을 소집했지만, 경기에는 내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월드컵과 멀어지는 줄 알았던 이강인이 최종 명단에 깜짝 발탁됐다. 그리고 첫 경기였던 우루과이전에서 교체 출장하며 활약했고, 두 번째 가나전 때는 후반에 그라운드로 들어오자마자 조규성의 골을 도왔다. 포르투갈과의 3차전은 선발 출장하며 16강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손흥민의 리더십 덕분에 위기에서도 팀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 중평(衆評)이다.
활달한 성격의 손흥민은 먼저 다가가 동료들을 챙겨주고, 필요하면 쓴소리도 내뱉는다. 그리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전부 주장인 나의 탓”이라고 하면서 선수들을 감싼다.
손흥민은 대표팀에 임하는 마음가짐도 남달랐다. 이번 월드컵 직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경기중 안와골절을 당하면서 대표팀 합류가 불투명했다. 하지만 손흥민은 수술을 받고 얼굴을 보호할 안면 보호대 몇 개를 챙겨 바로 카타르로 날아왔다. ‘다시 다치는 게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엔 “한국에서 응원하는 국민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위험성은 감수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대표팀의 여정(旅程)은 쉽지 않았다. 손흥민이 제 컨디션이 아닌데다 공격의 주축 황희찬은 허벅지 뒤쪽 근육 통증 탓에 3경기 전부 선발로 나서지 못했다. 붙박이 주전 스트라이커 황의조는 제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김민재는 우루과이전에서 오른쪽 종아리를 다쳐 가나전에서 부진했고, 포르투갈전은 결장했다.
여기서 나타난 게 조규성(24)과 이강인(21)이었다. 조규성은 우루과이전에 후반 교체로 나와 짧은 시간에도 눈길을 끄는 플레이를 펼쳤고, 가나전에서는 한국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멀티골(한 경기 2골)을 넣었다. 그는 “솔직히 나는 별 거 없는 선수인데 월드컵이라는 세계적 무대에서 골도 넣었다”며 “끝까지 자신을 믿고 열심히 꿈을 위해 쫓아가면 이런 무대에서도 골을 넣을 수 있다”고 했다.
이강인은 월드컵 직전까지 대표팀 승선조차 불투명했다. 2021년 3월 이후로 지난 9월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벤투 감독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강인은 올 시즌 소속팀에서 묵묵히 활약하며 부름을 기다렸고, 월드컵 대표팀에 깜짝 승선하며 카타르로 동행했다. 포루투갈전에서도 후반 교체될 때까지 그라운드를 누비며 제 몫을 다했다.
그리고 지난 2경기를 햄스트링 부상 탓에 결장한 황희찬이 포르투갈전에 교체로 ‘깜짝 출전’ 했다. 황희찬은 후반 21분 교체로 들어와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고, 결승골을 넣었다. 그동안 출전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던 황희찬의 드라마틱한 마무리였다.
카타르 월드컵은 대한민국의 저력과 위상을 전 세계에 떨친 값진 무대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여기서 역주행하는 우리 정치권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지난 대선에서 간발의 차로 석패한 이후 사정 한파에 직면한 민주당의 위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해도 거야(巨野)의 완력을 과시하며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안건과 정책엔 사사건건 퇴짜를 놓는 대신 자신들의 잇속과 총선 득표에 도움되는 것이면 물불안가리는 행태를 보여 볼썽사납다.
또한 시시콜콜한 네거티브 공격으로 일관하는 듯한 모습은 짜증스럽기조차 하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도 이태원 참사나 MBC사태, 도어스테핑 중단 등 현안(懸案)을 감정적 단선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집권여당의 소통과 포용정신을 회복해야 마땅하다.
여야 모두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아시타비(我是他非,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타령을 언제까지 할 건가.
일자리, 세금, 집값, 복지 같은 민생에 전력투구할 때 국민들은 안도하고 박수를 보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민의 선량(選良)답게 소리(小利)를 버리고 대의(大義)를 좇아야 하는 이유다.
국민들은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등 경기침체와 팍팍해진 살림살이에 화물연대 파업 등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까지 겹쳐 풀이 죽어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한 줄기 빛처럼 월드컵 태극전사들의 선전(善戰)과 무용담(武勇談)이 이런 연말 분위기에 큰 위안이 되고 있다.
국리민복(國利民福) 보다 자신들의 안위(安危)와 권력쟁취를 위해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고 있는 우리의 정치 현실이 월드컵 국가대표팀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위국헌신(爲國獻身) 활약상과 대비돼 참담한 심정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지도자 샤를 드골 대통령(1890~1970)은 의회에 불만을 품었지만, 의회를 해산시키지 않았고 우파의 지지를 받았지만, 좌파를 멸시하지 않았다.
“축구에서 상대방은 라이벌이지만, 그들이 없다면 경기를 할 수 없다. 정치인들이 축구로부터 이런 점들을 배웠으면 좋겠다.”
세계적인 축구 명장(名將)이자 ‘축구 전도사’ 거스 히딩크 감독의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