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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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회사를 경영하던 이춘원 작가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특별하다. 그는 78세에 갑자기 직장암 3기 선고를 받고 쓰러졌다. 겨우 안정을 되찾고 인생의 마무리를 하려니 세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부모에게 못다 했던 효도요, 좋은 친구들이 많이 사는 일본과의 껄끄러운 관계였고, 끝으로는 아무것도 해놓은 것도 남긴 것도 없이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었다. 비록 식견은 짧지만, 어릴 때의 꿈을 찾아 그동안 살면서 보고 들은 경험과 느끼고 울어난 나름대로의 생각을 엮어 죽기 전에 소설이나 한편 남겨 놓고 싶었다.
그는 소설을 쓴답시고 후유증의 고통을 견디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소회했다. 언제 암이 재발 될지, 또 나이 팔십이란 시한에 마음이 조급했다.
자다가도 좋은 글이 떠오르면 일어나서 글을 다듬었다. 두툼한 국어사전 앞장은 이미 떨어져 나가고 마침내 낮과 밤이 헷갈렸다.
고민에 시달리다가 한승원 선생에게 이런 사실을 메일로 보냈다. 그랬더니 답이 왔다. 2,000매가 넘는 분량이라니 집념이 대단하다며 몇번이고 퇴고를 하라는 충고였다. 한승원 노작가도 원고를 제출할 때는 열 번쯤 퇴고를 한다고 했다. 이 가르침이 큰 힘이 되었다.
일곱 번 쯤 글을 다듬었더니 차차 소설 같은 것이 되어 갔다. 아내는 유서라도 쓰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걸 돋보기 너머로 샅샅이 읽어보더니 책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교정을 봐주었다. 그러나 너무 지치고 정말로 돌아버릴 것만 같아서 여섯달만에 출판사를 찾아갔다. ‘현해탄’이란 제목으로 여명에 쫓기며 서둘러 출판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명작가의 한계와 설움을 느꼈다. 수술 후유증을 극복하고 글을 쓴 과정을 ‘삶의 질’이란 수필로 써서 에세이문학에 등단했다. 그리고 단편소설 '리 따이한의 나상'과 ‘앵무새의 바보소리’ 두 편을 써서 문학사계 신인문학상 소설부문에 당선되어 소설가의 길을 걷는다.
이내 무작정 썼던 처녀작인 『현해탄』의 초판을 다시 읽고보니 몹시 불만스러웠다. 부족하고 잘못된 곳과 오자 탈자 틀린 문장이 너무 많이 발견되어 한동안 글을 쓴 사람으로서 독자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고민을 했다. 성급하고 무모하게 출판한 일을 후회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한동안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가 담긴 이 소설은 시대와 국경을 넘나든 반항과 모험,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이 감동을 주는 400쪽이 넘는 그의 역작이다. 관용을 큰 주제로 담고 자기 성찰과 인내와 평화를 인간의 아름다운 심성에 호소하고 있다. 이 사회의 부조리와 악을 정화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가족이란 무엇인가? 사죄와 용서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미움과 사랑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가깝고도 먼 애증의 한일! 꼬여만 가는 갈등을 어떻게 풀 것인가? 우리는 짧고 허무한 생애를 어떻게 살다가야 하는가를 독자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했다.
불우한 시대에 태어난 소설의 주인공은 구습에 찌들고 부조리한 사회에 반항하며 집을 뛰쳐나간다. 혼란의 와중에 뜻하지 않게 지리산으로 따라가 빨치산이 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일본으로 탈출을 하려다가 구사일생 혼자 살아남는 데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죽음의 별학산을 탈출하여 비밀을 가슴에 감춘 채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주한다. 조센징이란 열등감과 파란만장한 시련을 이겨내며 이즈반도에서 아름다운 여인 미치코를 만난다. 그사이 노부모는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하며 자유를 찾으라는 유서를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주인공은 뒤늦게 어린 아들과 미치코를 위해 조국을 버리려고 하지만 한국의 며느리가 된 그녀의 반대에 부딪친다. 작가는 미치코와 가족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애증의 경계에서 고뇌 속의 그 해답을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이 작가는 여전히 수술 후유증으로 외출이 어려운 몸이 되었으나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소설과 수필을 써서 문학사계와 한국소설, 에세이문학에 발표했다. 그가 열정을 쏟아 쓴 소설은『리 따이한의 두 나상』『애처가』『앵무새의 바보소리』『형수』『잃어버린 실버스타』『식칼』『이데올로기의 유산』『하얀 민들레 꽃』『장미꽃 80송이』9편의 이 단편과 중편소설이다. 이를 엮어 문학사계가 소설집『하얀 민들레꽃』을 출판했다.
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인 황송문 선문대학교 명예교수는 ‘사랑과 생명의 미학’이라고 작품해설을 했다. 이춘원 작가의 소설은 아름답다. 그 근원을 찾아가면 ‘사랑과 생명’에 이른다.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기 마련이다. 이 작품에는 어떤 사랑이 있기에 아름다운 표현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기에 가능하다. 끌어들이는 인력 위주의 사랑은 순간의 쾌락에 그치지만 원력 위주의 사랑은 영속적 존재근거가 되므로 보다 영속한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가 주어진다. 이 책은 사랑의 원본을 닮아있다. 소설의 반전과 클라이맥스 역시 이정미학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천정(天情)을 닮은 인정미학(人情美學)이기 때문이다. 소설 풍향은 굴광성 식물처럼 보편적 지리를 향해있다. 이 책의 제호로 쓰이는 ‘하얀 민들레꽃’은 감성과 지성을 균형 있게 조화시킨 작품으로서 지·정·의(知·情·意)를 고루 갖춘 가작의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