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석호 교수
▲ 류석호 교수
며칠 전 영화 ‘오펜하이머’를 관람했다.

러닝타임 180분(3시간)의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영화였지만, 재미를 넘어 많은 것을 곱씹게 하는 의미있는, 근래 보기 드문 수작(秀作)이라 평가할만 했다.

8.15 광복절에 맞춰 국내 개봉된 이 영화가 계속해서 박스 오피스 정상을 지키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더불어 영화 ‘오펜하이머’(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킬리언 머피 등 주연)의 인기에 원작 도서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미국의 천재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를 조명한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AMERICAN PROMETHUS, 카이 버드·마틴 셔윈 공저, 퓰리처상 수장작)’가 교보문고가 집계한 8월 넷째 주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2위를 기록했다.

놀런 감독은 오펜하이머를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고 그 형벌로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불을 훔쳤듯이 오펜하이머도 우주의 원리를 통해 핵분열 아이디어를 얻어 형벌을 받는 것으로 묘사한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1945년 7월 12일 오전 5시 30분,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1940년대 미국이 원자폭탄을 만들 목적으로 추진)의 총책임자로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 뒤 오펜하이머가 한 말이다. 위대한 천재의 모순과 고뇌가 절절하게 배어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선택을 해야 하는 천재 과학자의 핵개발 프로젝트를 다룬 이 영화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계 유대인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담았다. 그는 ‘핵이 인류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해 말년에는 ‘군축(軍縮·군비 축소)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청문회를 통해 그가 핵폭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인물이지만 소련 스파이와 공산주의자라는 굴레를 씌워 괴롭힌다.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만들어진 핵폭탄은 일본 제국을 항복시키고 마침내 태평양 전쟁을 끝내게 된다. 하지만 이때 핵 공격을 받은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의 참상을 접한 오펜하이머가 핵무기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과정을 영화는 아주 지루한 대화를 통해 그려낸다.

사람을 죽이는 살상 무기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노벨이 ‘노벨상’이라는 걸 만들어 후세를 위하듯이 오펜하이머 역시도 현대사에서 인류의 재앙이 될지도 모를 핵폭탄을 만들었지만 그로 인한 인간의 살상과 죄책감, 핵무기 증가에 대한 우려를 표현하며 핵무기를 반대하는 편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가 세상을 떠난지 50여년이 흐른 지금, 각국이 핵무기를 빠르게 늘려가며 세상을 파괴로 몰아넣을 위험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원작에 해당하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원작자들이 이 책 서문에서 “전 세계적으로 냉전이 종식됐지만, 오펜하이머가 1946년 제안했던 핵무기 국제 통제계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쓴 까닭이다.

미국 과학자연맹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에 있는 핵탄두는 9576기에 이른다.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을 한마디로 적자면 핵무기 확산으로 더 커져가는 냉전(冷戰)과 세계 파멸에서 어느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에도 중간중간 수소폭탄 얘기가 나온다. 핵폭탄보다 더 강력한 폭탄이다. 영화에서는 수소폭탄을 개발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1956년 구소련에서 개발한 ‘차르 봄바(Tsar Bomba·황제 폭탄)’라는 수소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보다 무려 3800 배나 강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화구 반경 8km 안에 있는 모든 게 순식간에 증발하고 100km 안에 있으면 3도 화상을 입을 수 있는 위력이다. 이로 인한 충격파나 복사열, 방사능 등을 고려하면 우리나라는 한순간에 전멸할 수 있다.

당장 북한의 핵무기(核武器)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냉전(冷戰)의 땅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핵폭탄은 무엇보다 시급한 생존의 문제다. 영화에서 핵폭발 후 섬광(閃光)에 뒤따르는 거대한 파괴는 무성으로 처리됐는데 3시간 러닝타임의 지루함을 날려버릴 가장 섬뜩하고도 소름끼치는 순간이다. 이게 실제라면 상상조차 하기 싫다. 영화에서 말하는 파멸의 연쇄반응은 단추 하나로 언제든지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편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서 새삼 절실하게 뇌리에 떠오른 것은 유대인의 저력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유대인들의 교육이었다.

우선 영화 ‘오펜하이머’에 나온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면면을 살펴 보자.

오펜하이머의 멘토로 ‘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필두로 닐스 보어(오펜하이머 영국 유학시절 교수, 덴마크계 유대인, 1922년), 엔리코 페르미(이탈리아계 유대인, 1938년), 이지도어 라비(끝까지 오펜하이머 옆을 지킨 절친, 1944년), 리처드 파인만(폭탄 실험할 때 차에서 지켜봄, 1965년), 한스 베테(독일계 유대인, 1967년) 등이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의 절대 다수가 유대인이었다.

특히 오펜하이머의 재능을 알아보고 이론물리학의 길에 매진하도록 이끈 독일 괴팅겐대 시절 지도교수 막스 보른(‘양자역학’ 용어 만든 주인공, 1954년 노벨 물리학상, 팝스타 올리비아 뉴튼 존의 외조부)을 빼놓을 수 없다.

이밖에 오펜하이머와 마찬가지로 노벨상을 받지 못했지만,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워드 텔러(헝가리계 유대인), 헝가리 태생으로 1939년 아인슈타인과 함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를 보내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건의해 ‘맨해튼 계획’을 추진토록 한 실라르드 레오(1898~1964) 역시 유대인이다.

전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한 유대인(약 1500만명)이 세계를 움직이는 유대인 파워는 어떤가.

특히 미국은 유대인이 움직이는 국가다. 미국의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2.2%가 넘는 680만명 정도인데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전 분야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미국 100대 부자의 3분의 1, 노벨상 수상자의 3분의 1, 아이비리그 명문대 교수진의 40%, 법조계 엘리트 50%, 헐리우드 영화계의 60% 이상이 유대인이었다.

도대체 그들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뭣보다 이제 우리도 잘 아는 유대인들의 교육 방식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겠다.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쌍방이 소통하는 자율식 교육이었고, 옳다(O), 그르다(X)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과정(창의성)을 중시한다.

다음으로 유대인들의 인간관이다. 인간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감추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기록한다.

한마디로 정답·오답이 아니라 인간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가르치려고 한다. 과학자가 특히 많이 배출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예컨대 그들의 가장 위대한 영웅인 다윗왕이 부하 장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는 ‘만행(蠻行)’도 그대로 기술하고, 선지자(先知者) 모세가 순간적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집트인을 죽인 ‘살인자’란 사실도 그대로 가르친다. 사실(fact)을 사실대로 알려줌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확실하게 알고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인간의 공(功)과 과(過)를 분리해 생각하는 유연성과, 용서와 희망을 통해 인생은 언제든지 반전(反轉)이 가능하다는 상상력이다.

우수한 민족으로 일컬어지는 유대인들의 배경에는 특별한 교육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브루타’라는 교육방식이다. 그들은 아이들이 철이 드는 시점부터 가정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게 하며 해법을 찾아내는 훈련으로 창의력을 연마시킨다. 밥상머리 교육인 셈이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질문(質問)을 하고 토론(討論)을 하며 텍스트(책 등)를 비판적으로 해석한다.

유대인들의 질문과 논쟁 그리고 독서로 이어지는 하브루타 습관은 유대인들이 강한 민족이 되고 오랜 역사의 수난을 견뎌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브루타를 실천한다.

‘물고기를 잡아주기 보다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유대인의 격언(格言)은 바로 그들의 교육이 어떤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들은 어릴 적부터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내재화 되어 있다.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 오로지 획일적인 지식의 주입(注入)으로 기계식 생각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교육의 전부다. 어릴 적부터 시험점수에만 매달려 오로지 암기식 학습에 치우쳐 있어 창의력 배양과는 거리가 멀다.

선진국 중 대학 입학시험을 기계가 OMR(광학카드 인식) 방식을 통해 채점하는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이 웅변한다. 대입 시험에서 어떤 문제(주제)에 대해 수험생의 깊이 있는 의견과 생각을 묻는 게 아니라, 지문(地文)을 읽고 정해진 객관식 몇 개 답안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게 하는 식이다. 사유(思惟)의 깊이나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하는 학문의 근본정신을 간과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 있다. 대학진학률을 보면 선진국들이 평균 40~60%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80%에 이른다. 대학 입학생 숫자로는 계속해서 세계 최고를 보여준다. 그러나 성적순으로 매겨진 고학력이 창의성을 담보한다고 할 수는 없다.

경제규모 10위권 국가로 성장한 우리나라는 1인당 GDP(국내총생산) 4만 달러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경쟁력의 근원이 되는 교육경쟁력은 어느 수준일까.

2022년 IMD(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 국가경쟁력 평가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교육경쟁력은 63개국 중 29위이다.

그나마 29위를 지탱해준 지표는 문맹률(1위), 대학진학률과 연관된 고등교육 이수율(4위), 학업성취도(6위)다.

반면 GDP 대비 교육 관련 공공지출은 42위, 대학교육(사회요구에 부합 정도)은 46위, 경영교육(산업계 요구에 부합정도)은 46위, 고등교육 외국인 학생수 40위에 불과하다.

고등교육의 질을 개선하고 혁신을 유도하기 위해 여러 정책이 시급히 요청되는 이유다.

이제는 교육의 판을 바꿔야 한다. 우리 교육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때다. AI시대에 아직도 선택형 문제 풀이의 늪에 빠진 한국교육을 구해내야 한다. 지금까지의 개인주의적 경쟁방식의 교육방식, 학습방법, 수업형태, 평가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근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1학년 담임 20대 여교사가 학부모의 갑질 등에 힘겨워하다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에서 보듯 추락한 교권(敎權), 붕괴된 교실 등 극단적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한 우리 교육의 참담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대수술하는 일에 전 국민적인 관심과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이다.

“교육은 머릿속에 씨앗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저명한 레바논계 미국인 시인·작가 칼릴 지브란(1883~1931)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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