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뷰를 진행한 어느 중소형 밴처캐피탈(VC) 직원의 하소연이다.
지난 몇 년간 실물경기 둔화와 세계적 고금리 영향으로 투자 심리가 위축되며 벤처투자 업계는 ‘투자 혹한기’를 보내왔다. 이런 상황 속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이 등장했고, 1금융권에서도 자체적인 VC를 만들면서 기존 중소형 VC입장에서는 ‘설상가상’의 국면을 맞이했다.
여기에 금산분리(금융업과 산업분리)의 원칙에 따라 금융사를 소유할 수 없었던 일반지주사들도 2021년 12월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CVC를 보유할 수 있게 되자 시장의 팽창은 가속화됐다.
결국 대기업부터 중견기업, 심지어 스타트업까지 너 나 할 것 없이 투자사 설립에 나서며 이른바 ‘CVC 전성시대’가 도래하게 됐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오게 됐다.
이는 경기 불확실성과 고금리 등으로 벤처투자 업계 자금줄이 말라가던 상황에서 그간 민간 출자자(LP) 역할을 해왔던 법인들이 외부 VC 대신 CVC로 몰리게 했다. 이러한 상황들은 결국 중소형 VC들의 자금조달에 차질로 이어졌다.
물론 재원이 부족한 상황에 처한 LP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자본금과 든든한 모기업을 뒤에 두고 있는 CVC에게 지갑이 열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중은행이 만드는 VC도 중소형 VC들에게도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중소형 VC에게는 단순히 경쟁사가 늘어나는 것뿐 아니라 기존에 자금을 대주던 투자자가 경쟁자로 바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은행은 연기금, 공제회 등과 함께 대표 LP의 역할을 해왔다.
중소벤처기업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은행을 제외한 금융기관 벤처펀드 출자금액은 2조4255억원으로 전체 비중의 22.6%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정책금융인 모태펀드(13%)와 연금 및 공제회(10.3%)보다도 많은 수치이다.
물론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의 증가 자체를 나쁘게 볼 수만은 없다.
CVC는 전략적 투자자(SI)로서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통한 성장을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점과 모회사 사업과의 시너지를 기대하는 등의 장점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후죽순으로 증가하는 CVC로 인해 기존 중소형 VC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자연스러운 벤처 생태계가 뒤틀리는 것을 예의주시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6월 한국엔젤투자협회는 올해 신규 팁스(TIPS) 운영사 34곳을 선정했는데 이 중에는 VC와 대기업이 포함돼 있었다. 기존 엑셀러레이터(AC)를 위해 마련된 팁스 프로그램에 VC와 CVC가 선정된 것인데, 이는 마치 취업난으로 갈 곳을 잃은 대학교수 혹은 고등학교 강사가 초등학교 강사로 취업하는 상황과도 유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러한 상황은 AC만 지원 가능했던 팁스 프로그램에 VC와 CVC가 지원이 가능하게 된 것은 2021년 12월 개정된 창업지원법 때문이다.
가파르게 증가한 CVC와 투자 위축기로 인한 LP확보의 어려움, 아울러 급격하게 변경된 제도, 이러한 상황이 맞물리며 CVC. 중소형VC가 AC의 자리까지 넘보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기존 중소형 VC들은 CVC가 제공할 수 없는 나름의 장점과 역할 수행의 부분도 있다.
중소형 VC는 초기 기업에 자금 조달 그 이상의 역할을 제공하는데, 규모가 작은 VC일수록 특정 산업 출신의 인력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원 구성은 신규 사업을 진행하는 스타트업에게 관련 업계의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등 구성원의 전문성을 살려 벤처투자 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
또 무조건 중소형 VC를 살려달라는 소리가 아니다.
이미 벤처 시장 규모는 과거와 비교해 너무나도 커졌기에 이에 맞는 규모의 대형 CVC의 역할도 필요한 시점이다.
처음부터 대기업이었던 회사는 없다. 산업의 규모가 증가하며 대기업, 중소기업, 스타트업이 생겨났고 이들은 산업 분야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산업 분야를 책임지고 있다.
이처럼 산업 분야에도 중소기업과 대기업 각자의 역할이 있듯 벤처 업계도 각자의 위치에서 전문성을 키워 안정적인 벤처 생태계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투자사별 규모에 따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각자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관련 제도가 필요할 것이다.
벤처투자는 국가의 미래를 담당하는 중요한 분야인 만큼 투자 혹한기에 이중고를 겪은 중소형 VC를 위한 정책과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통해 균형 잡힌 벤처 생태계가 오길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