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봉 기자
▲ 이기봉 기자
‘9981’이라는 숫자가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의 수가 전체 기업의 99%를 차지하며, 전체 근로자 중 81%가 중소기업을 다닌다는 의미로 지난 2022년 중소벤처기업부가 공표한 ‘2020년 기준 중소기업 기본통계’에 따른 수치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근로자 중 81%가 재직 중인 중소기업에서 최근 국회를 향해 어느 법에 대한 시행을 멈춰달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바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대재해처벌법)이 50인 미만의 사업장에도 적용되는 것을 유예하기 위함이다.
 
지난 14일 중소건설단체와 중소기업단체협의회 등 중소기업인 약 4000명이 수원컨벤션센터에서 50인 미만 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유예를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중소 제조·건설업체의 80% 이상이 중대재해처벌법을 준비하지 못했고, 소상공인들은 자신들이 법 적용 대상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며 “영세 건설사는 사장이 형사처벌을 받으면 폐업 위기에 몰리고,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렇지만 노동계에서는 오히려 중대재해처벌법의 엄정 집행을 환영하며, 근본적인 사고 예방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최근 “정부와 국회, 사용자 단체는 안전보건 체계를 구축하고 지원하는 등 중대재해처벌법 상 안전보건의무를 준수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렇게 노사간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처벌 조항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히고 있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도 중대재해처벌법 유예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되지 않을 경우 중대재해 사고가 인과 관계 입증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처벌도 과한 측면이 있어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겠다고 예고한 상황이다.

실제 중대재해처벌법 4조와 9조에 따르면 사업주와 경영책임자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동법 6조와 10조에 따라 이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법 처벌 조항에서 징역형은 대부분 ‘~년 이하의 징역’을 뜻하는 상한형을 정하고 있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의 조항은 ‘1년 이상의 징역’인 하한형으로 규정하고 있어 징역형을 받은 사업자 또는 경영책임자는 최소 1년 이상의 징역을 살게 된다.
 
특히 50인 미만의 중소기업 사업자가 1년 이상의 징역을 받게 되면 해당 기업은 제대로 된 경영활동을 하지 못해 회사 자체가 도산에 빠질 가능성도 존재하게 된다.
 
또한 강한 처벌 수위에도 불구하고 면책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문제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아무리 사업자가 책임을 다하더라도 노동자의 부주의로 중대 재해가 발생하면 이를 방어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회에서는 이러한 중대재해처벌법의 법리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총선 때 양대 노총의 지지를 얻고자 800만 근로자의 생계를 위기에 빠트린 결정은 선거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해당 법안의 유예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반면, 더불어민주당 측은 이미 법 시행이 된 상태에서 유예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다.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최근 “법이 시행된 이후에 다시 멈춘다는 것이 원칙적이지 않다”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느냐,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 가치인 생명과 안전 존중이라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받지 않았던 50인 미만 사업장의 중대 재해의 사망자 수가 지난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면서, 실효성 공방 논란까지 일고 있다.

실제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9월 발표한 ‘2023년 9월말 산업재해 현황 부가통계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 발생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3년 3분기 누적 재해조사 대상 사고사망자는 459명으로 전년 동기 510명 대비 51명 감소했다.
 
또한 당시 법 적용을 받지 않은 50인 미만의 사업장은 267명으로, 전년 대비 41명이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고용부는 이러한 감소의 원인을 제조업을 중심으로 시행한 위험성 평가 및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구축해 위험요인을 파악하고 개선대책을 신속히 마련한 것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 산업현장에서 이미 일어난 사고에 대해 처벌하기보다는 중대 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에 일선 현장에서는 처벌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산업 종사자들의 생명과 안전이 가장 우선으로 하는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사업자가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인해 처벌 받더라도 현장에서 일하는 다른 근로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대안 마련도 시급히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많은 논란 속에도 중처법 유예는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적용 일주일여만에 건설업과 제조업 분야의 영세사업장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한 조사가 착수되는 등 사회적 혼란마저 빚어지고 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최근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혼란을 최소화 하겠다고 밝혔으나, 현장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법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과연 올바른 방법인지 되묻고 싶다.

현재 레미콘 업계부터 한국경영자총협회, 중기중앙회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중처법 유예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거세지면서, 절박한 고함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젠 정치권이 이들의 고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 전향적인 태도 변화가 있어야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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