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 박현채 주필
민주주의의 축제인 총선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국민들의 얼굴에는 즐거움보다 수심의 표정이 역력하다. 선거운동 기간 중 입에 담기 힘든 막말과 조롱, 모욕과 함께 지나친 적대감과 배타성, 공격성을 생생하게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는 그야말로 ‘팬덤 정치’ 선거였다. 정치는 사라지고 “정치 전쟁”만 있었다. 도저히 대화하고 협력이 불가능한, 혐오로 가득찬 민주주의가 판을 쳤다. 오로지 범죄자 심판과 정권 심판만이 난무하고 정치인은 물론 역사적인 인물과 여성까지 혐오하는 역대 급 분노 선거였다. ‘이화여대 미군 성 상납’, ‘연산군 스와핑’, ‘나베(일본어로 냄비)는 밟아야 제맛‘, ’정치 개같이 하는 사람’, ‘4.3 학살의 후예’, ’문재인 죽여야’, ‘윤석열 사형’ 등 저주가 판을 쳤고 대파와 법인카드 논쟁 등이 전개됐다. 과거에 대한 보복과 응징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저성장과 저출산, 고령화 등 우리에게 닥친 위기와 정책을 논의할 자리는 없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시대의 질서로 양극화와 비타협이 싹터왔다. 1980년대에 가수 조용필 오빠 부대를 선두로 1990년대에 가수 서태지의 열성 팬들이 등장하면서 우리나라에 팬덤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이것이 정치에까지 번지면서 정치사회가 포퓰리즘과 강경한 진영 정치, 분노와 팬덤 정치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정치인들도 ‘강경파’로 변모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됐다.
 
팬덤 정치는 정치에 직접 참여한다는 만족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자신들의 집권만이 정의로운 것이라는 고집과 이로 인한 리더에 대한 비이성적 충성심이 합리적 대화와 토론을 거부하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요새화된 진영 정치는 팬덤 정치 아래서 다시 한번 힘을 얻는다. 이는 정부를 오만하게 하고 시민들이 분별력을 잃도록 유도한다. 이번 선거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총선의 흐름은 포퓰리즘과 분노로 대별된다. 여야의 선거공약은 국민 개개인의 욕망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표출됐다. 철도 지하화와 같은 비현실적 공약과 향후 경제위기의 뇌관이 될 수 있는 무분별한 규제 완화, 국가 채무를 늘리는 무리한 감세 등 포퓰리즘 정책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색깔 논쟁까지 겹쳐지면서 적과 동지의 이분화가 공고해졌다. 유례없이 높았던 사전투표율도 상당 부분 혐오 정치에 동승한 심판의 투표일지 모른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이번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들의 국가적 책무는 너무나도 크다. 나라가 한 차례 더 도약할 것인지 좌절할 것인지 분기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저성장이 고착화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생활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저출생과 고령화,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을 보이는 위기상태다. 게다가 북한을 비롯한 동북아정세와 신냉전질서가 심상치 않으며 세계적인 기후위기로 예측이 무척 어려운 상황이다. 이로 인해 현재가 정점이 아니냐는 ‘피크 코리아’ 불안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진영 간 쌈박질만 더 거세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국민들은 새 국회에 기대하는 '3대 정책' 분야로 민생·저출생·경제 재생을 꼽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달 하순께 만 18세 이상 1만2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22대 국회가 추진해야 할 정책 분야로 33.6%가 민생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이어 저출생 해결(22.7%), 기업 지원(12.3%), 자영업 지원(12.3%), 지역균형(8.8%), 복지(6.6%), 기후위기(3.7%) 순서로 조사됐다.
 
이번 총선의 집권 여당 참패는 지난해 10월 실시된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총선 중반에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고 외압 의혹과 관련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수사 선상에 오른 이종섭 전 국방장관을 호주대사로 임명하는 등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윤석열 정부의 안하무인식 인사와 지지층에만 의존하는 폭정 탓이 크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여론조사가 보여주듯 피폐해진 서민의 삶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새 국회와 정부는 무엇보다도 의대 정원을 포함한 의료대란 해소와 치솟는 물가 억제 등 민생현안부터 챙겨야 한다. 더 나아가 코로나 19 이후 심각해진 양극화 해소와 연금과 노동, 교육 등 3대 개혁과제를 적극 해결해야 한다. 이와 함께 정치권의 꼼수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현행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제도도 당초 취지에 맞게 개정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통합이 전제돼야 한다. 윤 정부는 지금과 같은 독선에서 벗어나 대화와 타협, 책임 정치 구현을 통해 거대 야당과 국민의 협조를 이끌어 내야 한다. 또다시 의회 권력을 장악한 야당도 자만하지 말고 주권자들의 냉철한 의식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국가통합을 이뤄내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경쟁력을 좀먹는 고질적 병폐들을 도려내는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투데이코리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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