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민석 기자
▲ 진민석 기자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笑劇)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
 
칼 마르크스는 정치학 내 ‘자본론’으로도 일컬어지는 자신의 저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근대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의 역사 반복론을 인용해 이같이 적었다.
 
약 170년이 지난 후 마르크스의 특유의 색깔로 재해석한 역사 반복론은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듯 보인다.
 
지난 2019년 7월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를 주축으로 한국에 대한 수출통제 조치가 시작되면서 한일 무역 분쟁으로까지 이어지자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다.
 
분명 한반도 내부에서도 ‘노재팬 현상’이 국수주의적 발상이라는 혹평도 쏟아지긴 했으나 대다수의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치솟자 이 또한 모습을 감추며 동조하는 분위기로 전환됐다.
 
역사적 그리고 지리학적으로 분쟁이 많았던 터라 대한민국은 일본에 대한 불매운동이 지난 1920년부터 꾸준히 일어나긴 했으나 2019년의 그것은 과거와 결이 달랐다.
 
먼젓번의 운동들은 일본 당국의 영유권 주장 혹은 망언 등으로 인해 주로 과거사 또는 독도 문제로 기인했으나 이번엔 경제 보복으로 빚어져 기업체들까지 참전한 비교적 큰 규모의 운동이었다.
 
이는 국내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 브랜드로 표기된 맥주, 의류, 자동차 제품들의 매출 급격 하락으로 이어졌고, 산업 곳곳에서는 국산화가 진행됐다.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질 즈음인 2024년, 역사는 다시 반복하려 하고 있다.
 
지난 2월 기준 월간활성이용자수(MAU)가 약 4297만명에 달하는 국민적 기업 네이버와 일본 국민 메신저 앱 ‘라인’(LINE) 운영사인 라인야후의 지분 공방전이 단초가 됐다.
 
표면적으로 봤을 땐 사기업 간 지분 공방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내막에는 일본 정부의 숨은 압력이 존재했다.
 
앞서 일본 총무성은 3월과 지난달 두 차례에 걸쳐 행정지도를 통해 라인야후가 시스템 업무를 위탁한 네이버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며 ‘네이버와의 자본 관계 재검토’를 명령했다.
 
지난해 11월 네이버 클라우드를 겨냥한 사이버 공격으로 인해 내부 시스템 일부를 공유한 라인야후 내 약 52만 건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그 명목이다.
 
이 같은 뒷배경이 매스컴을 타고 흘러나오면서 잠시 사그라들었던 반일 감정은 대한민국에서 다시 스멀스멀 점화되고 있다.
 
시민 사회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두고 ‘디지털 독도 사태’라고 일갈하면서 국회가 선제적으로 초당적 결의안을 채택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특히 야권에서는 정부 비판에 나설 좋은 기회를 얻은 모양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경우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행정지도를 지휘한 마쓰모토 다케아키 일본 총무상이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후손이라는 보도를 인용하면서 “대한민국 사이버 영토 라인 침탈”이라는 표현으로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아울러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라인야후 사태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독도를 방문하는 등 야권 전반에서는 이번 지분 공방을 기업 간이 아닌 국가 차원의 싸움으로 격화시키고 있다.
 
다만 정쟁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윤석열 정권에서 내줬다는 시각도 쏟아진다.
 
대통령실은 이번 공방전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할 즈음, 네이버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이를 두고 야당뿐 아니라 여당까지도 합세해 윤 정부의 단호한 입장을 요구하자 대통령실은 그제서야 입장을 내놨으나 결국 불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 됐다.
 
대통령실은 “네이버가 조금 더 진실되고 구체적인 입장을 주는 것이 정부가 네이버를 돕는 데 최대한 유리할 것”이라고 요청하는 한편, 일본 정부에는 “우리 기업의 의사에 반하는 부당한 조치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강력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라는 다소 ‘주객전도’된 입장을 견지했다.
 
한국의 민간 기업이 일본 정부에 명확한 입장을 밝힌다면 이후 이어지는 일본 현지에서의 기업 활동과 지분매각 협상력 유지 등에 타격을 받을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이를 두고 지난해 말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점진적 회복세를 보인 가장 큰 이유였던 ‘외교력’이 빛을 잃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앞서 마르크스가 역설한 비극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프랑스 제1공화정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된 것을, 소극을 두고선 그의 사촌인 루이 보나파르트가 제2공화정을 쿠데타로 전복한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결국 비극을 겪고 나서도 반성 또는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다음번엔 비슷한 사건이 보다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재연될 수 있다는 의미다.
 
윤 대통령은 마르크스의 가설을 방증할 것인가, 반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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