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시래 부시기획 부사장
▲ 김시래 부시기획 부사장
광고 회사에서 잘나간 사람치고 은근한 사람이 좀 드물다. 시도 때도 없는 경쟁 압박과 광고주 등쌀로 초치기 인생을 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예외도 있다. 올해 6월 현역에서 물러난 김현중 풀무원 부사장이다. 그가 집짓는 기술을 배워 산속에 놀이터를 지었다는 말이 들렸다. 제일기획 시절 동료이고 동갑나기라서 그의 인생삼모작이 궁금했다. 

폭염의 토요일이었다. 양양버스터미널로 마중 나온 그는 미리 장을 봐놓아서 필요한 것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범부메밀막국수에서 점심을 먹고 그의 집에 세시경 도착했다. 양양 서면 갈천리 구룡령로 59번 국도변 숲속이었다. 그는 일행을 계곡으로 안내했다. 산중턱부터 몇 계단을 이루며 쏟아져 내리는 서늘한 계곡 물이 허리까지 서늘하게 차올랐다. 삼복더위 때면 간절해질 만 했다. 여섯 시경 거실 통창에 맞붙은 나무 데크에 술상를 차렸다. 길게 펼쳐진 데크는 스무 명이 요가를 해도 무난할 듯 널찍했다. 맥주와 와인, 소주를 농어회와 닭튀김, 돼지고기와 복숭아, 후배의 기타 연주를 안주로 마셨다. 지리산과 소백산과 오대산과 설악산으로 내달린 백두대간 너머로 붉은 노을이 저물자 하나 둘씩 별이 떠올랐다. 북두칠성이 선명했다. 취기가 오르자 열기가 식지 않은 시멘트 바닥에 누워 송창식의 ‘밤눈’을 들었다. 바람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작년에 그는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에 입학해서 집짓기를 배웠다. 거기서 집짓기 품앗이 ‘자크르협동조합’ 사람들을 만나 함께 이 집을 지었다. (‘자크르’는 ‘딱 알맞게 좋다’는 뜻의 우리말이다.) 그의 설계도에 맞춰 9월부터 공사가 시작됐다. 산비탈에 땅을 파고 레벨을 맞춰가며 철근으로 프레임을 잡았다. 

식수는 기본이라 이백미터가 넘는 수도관부터 매설했다. 늦가을에 구조체를 세운 뒤 수도, 전기, 정화조를 연결했고 현관문과 창호 시공도 마무리했다. 그는 철근이 싫어 목조패널과 공학목재로 건물의 틀을 잡고 통창을 위해 단층 데크 바닥에 철망을 두 번 깔아 지지대로 삼았다. 12월말 목재로 내부를 세우고 은색 골강판으로 외관을 마무리했다. 470평의 토지 위 17평 단층인 그의 집은 김정호의 ‘세한도’ 속 집과 닮아 담백하다. 

양평도 모자라 양양에 두 번째 터를 잡은 그에게 산과 숲은 그림자 같은 인생의 인연이다. 컴온이란 광고 회사를 차려 잘 나가다 신의를 저버린 동료 때문에 퇴사했다. 물만 마셔도 토할 정도로 아픈 날들이었다. 상처는 타인에게로 가는 통로라 했던가. 나 역시 등 뒤에 칼을 맞아 아픈 심경이었을 때 이심전심으로 함께 나눈 칼국수 한 그릇이 지금까지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 방황하던 그의 손을 제대로 잡아준 사람은 그가 광고주로 모셨던 분이었다. 바로 자연을 닮은 바른 먹거리 풀무원 사장님이다. 산이 좋아 양평에서 이태원에 있는 제일기획을 출퇴근했던 그는 풀무원에서 16년을 묵묵히 일했고 부사장까지 올랐다. 그러다 정년퇴직을 코앞에 두자 다시 자연에서 세 번째 인생을 시작했다. 사실 작년에 퇴직을 명받고 떠난 곳도 깊은 자연 속으로 어느 후배가 자신과 닮은 곳이라며 추천한 키르키르스탄이었다. 당시 배낭 속엔 그 후배가 챙겨준 호카 등산화와 멘톨로지 선크림, 몇 가지 옷뿐이었다. 인터넷도 전기도 없어 일 년에 삼개월만 사람의 발길을 허락하는 삼천미터 높이의 송쿨(songkul)에서 길을 따라 삼십사일 동안 걸었다. 

인연이란 질겨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따라오는 법이다. 

천장에 씰링팬을 달기위해 사다리에 올라타다 헛디뎌 나무 바닥에 나뒹굴어 두어달 목발을 짚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그는 이집을 내년부터 가끔 에어비앤비로 돌려 산행하는 사람들에게 내주기도 하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유산으로 남긴 법주를 브랜딩하는 일도 하겠다고 했다. 하긴 어머니 품속만큼 자연을 닮은 것이 어디 또 있으랴. 자연을 닮은 그가 자연으로 업을 삼고 밥을 먹고 길을 내고 있다. 그를 닮은 집처럼 배려의 내벽과 순리의 외벽으로 일관된 여생을 살아가리라. 한눈팔지 말라.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지금 당신을 웃게 하는 그것으로 인생의 매듭을 삼아라.

김시래 부시기획 부사장 약력
현 성균관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
전 농심기획 대표이사
전 한국광고총연합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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