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직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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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간 운용 과정에서 문제가 됐던 부문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손질하는 것도 늘상 있어 온 일이다.
그러나 이번 개편안 가운데 예산처의 분리 및 소관 이동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어쩌면 국가의 운명, 백년대계와도 직결될 수 있는 문제여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고, 경청해야 한다고 본다.
우려의 목소리들을 몇 가지만 보자. ‘재정 중독 신호탄’ ‘포퓰리즘 브레이크 무력화’ ‘재정 다이어트 실종’ ‘매표 복지 공약 난무 우려’ ‘미래세대 약탈 가능성’ 등등이다.
지나치게 과도한 우려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걱정들이 비판을 위한 비판만은 아니라는 것도 인정하고 국정 운용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예산 기능 어떻게 바뀌길래 이러나
현행 기획재정부를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로 분리한다. 신설되는 예산처는 정부 예산안 편성 및 배분, 국회 심의 대응, 집행 관리 업무를 맡는다.
정부 기금관리, 재정건전성 확보, 국가발전전략 수립 업무도 수행한다.
예산처는 경제부총리 통솔에서 벗어나 국무총리 소속 장관급 기구가 된다. 재정경제부는 세제 금융 경제정책 국고 기능만을 맡는다.
경제 부총리 산하 기획재정부의 업무 중 예산 기능을 예산처로 분리, 총리실 산하로 이관하는 것이 골자다.
그럼 쪼갠 이유가 뭘까. 정부 설명은 “경제정책 수립과 조정, 세입 세출 등 기능이 과도하게 집중된 기재부를 분리하는 것”이다.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국정 운영 과정에서 정부의 재정 동원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예산처가 총리실 산하로 들어가면 기존에 건전 재정에 무게를 두는 기능이 줄거나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기재부가 재정 컨트롤로 정부 부처 왕 노릇을 한다”며 예산 편성권을 대통령실로 이관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재정을 적극 활용(돈을 풀어)해 정책을 펴는데 제동을 거는 기재부 관리들(곳간 지기)이 눈엣 가시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건전 재정을 강조하며 국가채무비율 40%를 지키려 한 기재부 관리들을 향해, “40%의 근거가 뭐냐”고 몰아세우며 확장 재정을 추진했다.
당시 정세균 총리는 재정 지출 문제를 놓고 기재부가 난색을 표하자 “여기가 기재부 나라냐”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만큼 기재부 관리들의 건전 재정을 위해 고군분투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될까
예산 편성과 집행 과정에서 눈엣 가시를 제거(곳간 지기 무력화)하면 정부의 역점 사업을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 설명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까. 물론 순기능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견제 장치가 사라진 뒤 예산과 재정이 정치화하고, 각종 선심성 사업에 재정이 무분별하게 투입되어 포퓰리즘으로 흐를 가능 성이 높아지지 않을까가 걱정이다.
속성상 정치권은 정권 유지나 재창출을 위해선 물 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기재부 같은 정통 경제 관료들에 의한 견제를 통해 건전재정이 유지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예산처 분리가 이런 장치의 해체로 이어져 최소한의 건전 재정 유지 노력이 무력화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높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
이 대통령은 내년 예산안 의결 국무회의에서 “뿌릴 씨앗이 부족하다고 밭을 묵혀두는 우(愚)를 범할 수는 없다”면서 “씨앗을 빌려서라도 뿌려서 농사를 준비하는 게 순리”라고 말했다.
적극 재정을 통한 경제 활성화 의지 표명이다. 달리 보면 확장 재정 정책의 의지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어렵게 되살린 경기 회복 불씨를 성장의 불꽃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재정이 마중물 역할을 해야한다”며 확장 재정 기조를 분명히 했다.
정부의 내년 예산안은 올해보다 54조7000억원(8.1%) 늘어난 728조원 규모다. 역대 최대의 증액 예산 규모다.
재정 수입이 원만하다면 돈 풀어 경기 진작한다는데 반대할 사람 없을 것이다. 문제는 나라 살림 적자 나지 않고 운영이 가능하냐는데 있다.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통합재정수지에서 국민연금등 사회보장성 기금을 제외한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109조원에 달한다.
이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4%를 웃돈다. 선진국들이 재정준칙 기준으로 삼는 3%를 훨씬 넘는 수치다.
매년 적자가 누적되면서 내년말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51.6%, 2029년에 가면 58%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한때 50%를 재정준칙 상 마지노선으로 삼았던 것을 상기하면 실로 엄청난 채무비율이다.
재정 적자를 메우려고 국민이 세금으로 부담해야 할 ‘적자성 채무’는 내년에 처음으로 1000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적자국채 발행 등으로 자금을 마련해 쓰고 나면 결국 미래세대가 세금을 내 갚아야 할 빚이 ‘적자성 채무’다.
채무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채무고, 이는 곧 미래 세대가 갚아야 할 빚이다. 그래서 이러한 적자 재정을 두고 “미래 세대 약탈 행위‘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정부는 세입(수입)과 세출(지출)에 시차가 있어 일시적으로 돈이 필요할 때 한국은행으로부터 빌려 쓴다. 급전이 필요한 정부에 한은이 한시적으로 대출한다. ’한은 마이너스틍장‘으로 불린다.
이 마이너스통장(한은 마통) 규모가 지난 8월 한달 동안 31조6000억원, 1~8월 누적 대출규모는 145조5000억원에 달했다. 작년 같은기간보다 13.8% 늘어 역대 최고 기록이다.
정부 씀씀이에 비해 세금이 덜 걷히니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가계에서도 마이너스 통장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급할 때 말고는 삼가는 일이다.
각종 채무지표가 이처럼 경고음인데도 정부는 확장 재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대통령 말처럼 돈 없다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줄일 건 줄이고, 어느 수준까지 채무를 떠안는 게 가능한지 좀 더 숙고해야 할 상황이 아닌가 싶다.
지구촌 곳곳에서 경험하는 재앙(災殃)들
재정 포퓰리즘의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프랑스의 경우를 우리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면 너무 성급한 일일까...
프랑스에선 올들어서만 두 명의 총리가 나라 빚을 줄이자는 긴축안을 내놓았다가 불신임당했다.
국가가 부도 위기에 처해있어도 예산을 줄이자고 하면 정권 유지가 불가능하다. 구조적인 재정 문제에 겹쳐 갖가지 포퓰리즘 성격의 복지 정책에 중독된 국민들은 긴축에 동의하지 않는다.
각종 사회보장과 복지 지출은 이미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고, 이에따라 EU는 프랑스에 부채 축소 대책을 요구했다. 최근엔 사실상 국가부도인 IMF 구제금융까지 언급되고 있다.
그리스의 경우는 다르다. 40여년 전 집권한 파판드레우 좌파 정권은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주라“며 최저임금과 연금 지급액을 높였다.
포퓰리즘에 맛들인 국민들은 재정 파탄이야 나든 말든 돈 맛에 환호했다. 그 결과는 국가 부도사태, 신용등급 최하위 추락이라는 파탄을 가져왔다.
견디지 못한 그리스 국민들은 우파 정부를 선택,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회생 기회를 맞고 있다. 포퓰리즘의 댓가를 혹독히 치른 뒤였다. 지금의 프랑스와 반대다.
남미 여러 국가들의 ’포퓰리즘 – 경제파탄‘ 예는 수없이 들어왔다. 아르헨티나에선 ’오늘이 가장 싸다”는 말이 널리 쓰인다.
과도한 무상 복지와 경제정책 실패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 탓에 나온 말이다.
중남미 국가에서 잇따라 좌파 포퓰리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핑크 타이드’라는 말이 유행했다. 분홍 물결, 중남미 좌파 연쇄 집권을 이른다.
이들 나라에서도 서서히 좌파 포퓰리즘 정권이 실패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포퓰리즘에 대한 경계, 경제 파탄, 독재 정치에 대한 염증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핑크 타이드의 쇄락이 스며든다는 분석이다.
마약과 같은 포퓰리즘 중독이라는 값 비싼 댓가를 치른 뒤에야 나타나는 현상이다.
당장 손에 쥐어 주는 사탕 맛에 너무 오래 취하다 보면 그리스 프랑스 남미 같은 ‘선배 포퓰리즘 국가’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의 경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부담을 껴안게 될 미래 세대의 자각(自覺)이 절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