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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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실용 외교’를 내세웠다. 이념을 넘어서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실제로 한일 정상회담, 한미 정상회담에서 일정한 성과를 냈다.
한일회담 직후에는 17년 만에 공동 발표문을 채택했고,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참석 의사까지 끌어냈다.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는 “이제 한일관계가 풀리나”, “한미동맹이 안정되나” 하는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국제정치의 풍랑은 순식간에 방향을 바꾼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돌연 사임,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 불가능한 통상 전략, 조지아주에서 벌어진 대규모 한국인 구금 사태는 ‘실용 외교’의 시험 무대를 삽시간에 위기로 바꿔놓았다.
특히 한미일 협력 구도는 구조적 취약성마저 드러내고 있다.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동맹은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강화되지만, 동시에 불안정의 씨앗을 내포한다. 실제로 일본은 온건파 이시바 총리의 퇴장 뒤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전보장담당상과 같은 강경파 지도자 가능성이 커지는 형국이다.
이에 더해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거래적 동맹 관성이 여전하다. 한국 입장에서는 동맹을 통한 안정보다 불확실성의 비용을 더 크게 감당해야 할 수 있다. 삼각 동맹은 외형적으로 단단해 보이지만, 각국의 계산이 부딪히는 순간 금이 간다.
그 사이 BRICS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을 중심으로 이집트, UAE, 이란, 에티오피아까지 참여한 온라인 정상회의는 그들의 결속을 과시했다. 이 자리에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거버넌스 위기가 일시적인 게 아님을 목도하고 있다”며 국제질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을 겨냥해 “무역 전쟁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며 다자주의를 역설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자국의 전쟁 고립 상황에도 이날 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반(反)서방 연대’, ‘비(非)달러 협력’, ‘대안 블록’이라는 키워드가 동시에 떠올랐다.
BRICS의 결속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미국과 서방의 패권 질서에 맞서려는 신흥국들의 집단적 자구책. BRICS는 단일한 경제 블록이 아니라, 각국의 이해관계가 달라도 ‘서방에 대한 불신’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결속을 강화하고 있다.
반면, 한미일 동맹은 이와 대조적이다.
안보 협력의 틀은 존재하지만, 내부 정치 변수가 끊임없이 균열을 만든다. 일본의 강경 우파 지도자 가능성, 트럼프식 압박 외교, 한국 내부의 반감 여론. 외형적으로는 미국이 리더십을 쥔 듯 보이지만, ‘트럼프 리스크’라는 불안정성이 상존한다. 동맹이 단단해질수록 오히려 균열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구조다.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 외교는 바로 이 틈새에서 시험대에 섰다. 국익 중심의 유연한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는 있다. 하지만 BRICS의 결속과 한미일의 균열이라는 거대한 구조적 흐름을 돌파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국제정치에서 구조와 행위자의 선택은 늘 교차한다. 이 대통령의 선택이 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 아니면 구조가 행위자의 공간을 제약할까.
세계는 지금 두 개의 시나리오로 나뉜다. 하나는 결속하는 BRICS, 다른 하나는 갈라서는 한미일 동맹.
전자는 공통의 적대 의식으로 똘똘 뭉치고 있고, 후자는 동맹의 이름 아래 모였지만 내부의 불신을 감추지 못한다. BRICS는 결속을 자산으로 삼아 새로운 질서를 그려가고 있다. 반면 한미일 동맹은 내부 균열을 봉합하지 못한 채 불안정의 그림자를 키우고 있다. 동맹이 방패가 될지, 짐이 될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준비 없는 자에게 동맹은 족쇄가 되고, 전략을 가진 자에게만 동맹은 힘이 된다. 지금 한국 외교가 직면한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이 동맹을 짐으로 짊어질 것인가, 아니면 도구로 쥘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