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성
▲ 김재성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장례기간에 고인을 향해 쏟아진 저주 섞인 비난을 보면서 떠오른 안도현의 시구다. 고인은 평생을 공적 가치를 위해 헌신했다. 인권변호사로 성 평등주의자로 시민운동가로, 공동선이 지배하는 건강한 시민사회를 위한 선구자적 길을 걸었다. 그의 눈길은 언제나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등 소외된 사람들을 향했다.
 
고인의 헌신적인 삶을 이유로 그의 과오를 덮자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고인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고소인의 주장만 알 뿐 정확히 모른다. 다만 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종결지으려 했던 어떤 과오를 빌미로 그의 숭고한 삶을 폄훼하고 추악한 이미지를 덮어씌우려는 일부의 행태가 우려스러울 뿐이다.
 
우중에도 아랑곳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추모행렬, 고인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를 외면하고 죽어서 말이 없는 사람을 향한 일방적 혐의를 이유로 ‘서울시 장(葬)’ 반대, ‘조문사양’등을 발표한 것은 사자후대(死者厚待)의 상규(常規)에 어긋난다.
 
망자가 누구든 한 인간이 유명을 달리하면 가족이든 친지든 후학이든 인연 있는 사람은 슬퍼하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이 우리네 상례(喪禮)다. 설사 고인과 무관한 사람이라도 이웃의 슬픔에 공감하고 존중해 주는 것 또한 미풍양속이요 우리 문화다.
 
이 문화가 우리민족의 정체성이다. 이를 무시하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문전옥답을 장미화단으로 가꾸겠다는 발상이다. 물론 성 평등은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 상규를 뭉개버려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성 평등에 관한 한 고인도 선구자라 해도 과언 아니다. 일찍이 이를 위해 동분서주했고 수년 간 법정다툼 끝에 피해 여성의 승소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자살만 하면 죄가 덮이고 영웅이 되는가?’라는 비아냥도 야비하다. 그 보다 더한 짓을 하고도 뻔뻔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동안 추구해온 가치에 비추어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해 내린 비장한 결단은 오히려 인간에게 희망 있음의 증거 아닐까. 여기에 딴죽을 걸고 말장난을 한다면 막가는 세상이다.
 
성관련 사건은 2차 피해가 더 무섭다. 누군가 한 사람이 지목되면 메뚜기 떼처럼 달려들어 초토화 해버리는 2차 피해는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병이다. 박원순 시장의 극단적인 선택도 어쩌면 이것이 더 두려웠는지 모른다. 그러니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미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된 고소내용을 가지고 장례식 날 기자회견을 하는 것이 과연 고소인에게 도움이 됐을까. 그러고도 모자라 추가 행동에 나선다면 이는 등을 긁어준다는 것이 등을 할기는 격이 될 것이다.
 
고소인 주변 인사들이 고소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자결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고인이 된 사람을 악마화 하는 것은 고인을 잃고 상실감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자극할 것이며 결국은 고소인에 대한 2차 피해로 나타날 것이다.
 
10일 오전 9시 53분 경, 서울 종로구 와룡공원 배드민턴장을 모자를 눌러쓰고 터덕터덕 걷는 고인의 마지막 영상은 우리 사회에 ‘인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 혹자는 그 순간 속이 뜨끔했노라고 고백한다. 어찌 그뿐일까. 너나없이 마음속으로 간음전과 한번 없는 사람 드물테니 말이다.
 
순(舜)임금은 우(禹)임금에게 천하를 넘겨주면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니··중심을 잡으라.>고 했다.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위태로운 자기 마음이다. 누구나 한 생각 잘 못하면 금수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연탄재인들 함부로 발로 찰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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